일러두기
서 문 7
케네스 레이너드
이웃의 정치신학을 위하여 21
정치신학_27 / 정신분석과 이웃_46 / 이웃의 정치신학을 향하여_67
에릭 L. 샌트너
기적은 일어난다: 벤야민, 로젠츠바이크, 프로이트 그리고 이웃이라는 문제 119
슬라보예 지젝
이웃들과 그 밖의 괴물들: 윤리적 폭력을 위한 변명 213
윤리적 폭력 비판_215 / 이웃의 뺨을 때리기_227 / 대지 없는 피, 피 없는 대지_242 /
오드라덱을 정치적 범주로 보기_252 / 비인간적 과잉_269 / 부끄러움과 그 변천_281 /
사랑과 증오 그리고 무관심_289
찾아보기 303
옮긴이 후기 314
이웃
에릭 L. 샌트너님 외 2명
318p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 샌트너, 슬라보예 지젝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유대·기독교적 타자의 윤리를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통해 새롭게 사유하고 있다. 이들 세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은 ‘이웃의 정치신학’은 칼 슈미트의 ‘적과 동지의 정치신학’을 대체하지 않고 단지 보충할 뿐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게 슈미트의 정치신학이 전체의 판을 짜는 예외와 일반 혹은 특수와 보편의 변증법에 의해 규정된다면, 이웃의 정치신학은 ‘비전체’의 논리에 의해 규정된다.
저자/역자
목차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웃사랑이라는 타자의 윤리학에 대한 새로운 사유”
이 책「이웃」은 THE NEIGHBOR: Three Inquiries in Political Theology를 완역한 것이다.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 샌트너, 슬라보예 지젝은 몇 년에 걸친 강도 높은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 저서를 집필하였다. 저자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유대-기독교적 타자의 윤리를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통해 새롭게 사유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철학 논의의 중심에는 칼 슈미트가 있다. 그가 부상한 이유는 자유민주주의가 봉착한 위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라 함은 역설적으로 냉전적인 평화와 대비되는 탈냉전적인 증오와 갈등의 분출을 말한다. 세계의 정치적 지형을 바꾼 9.11테러와 이에 대한 부시의 대응은 생생한 실례이다. 9.11 이후 부시는 자유민주주의의 옹호를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인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는 전선을 강화하여 왔다. 그런데 칼 슈미트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바로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자기모순 혹은 내적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정치의 근본 영역이 적과 동지의 구별을 통해서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합리적인 개인과 이들이 이루는 보편적인 합의라는 환상에 근거하기 때문에 적대로 이어지는 집단정체성의 구성에 대응할 수 없으며 결국 정치적인 것은 무기력해진다. 그 결과 정치는 경제로 환원되며 그 반대급부로 정치적인 열정은 폭력과 증오의 범람으로 현상한다.
또 한편 그는 근대정치의 주요개념은 모두 신학에서 빌려온 것으로서 이는 질서를 형성하는 정치가 필연적으로 질서의 외부, 즉 신학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제대로 사유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그에게 근대화=합리화라든가 세속화=탈종교화라는 일반적인 도식은 결코 인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정치적인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주장하듯 합리적인 개인들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보편성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궁극적인 결단의 순간과 이를 통해 전개되는 새로운 법질서의 과정이었다. 결국 ‘정치적인 것’이 배제된 오늘날의 정치적인 상황, 곧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오늘날 한국 정치 현실에서 횡행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다. 여기에 개인들의 정치적인 합리성과 지도자들의 자기이익을 초월한 중재는커녕, 지젝의 표현을 따르면, “권력자를 옹호하는 극단적으로 냉소적인 엘리트주의와 무도한 대중들의 폭력적인 난동”이 판친다.
이러한 슈미트의 통찰은 이미 발터 벤야민의 사유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으며, 에른스트 융어, 알렉상드르 코제브, 야콥 타우베스를 거쳐 오늘날에는 데리다와 샹탈 무페 그리고 조르조 아감벤 등이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비판적 문제 제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웃」은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이 논쟁에 개입하는 시도이다. 케네스 레이너드는 라캉주의 정치이론이라 할 수 있는 ‘이웃의 정치신학’이 구성되는 이론적 건축물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있으며, 에릭 센트너는 이를 ‘유대-기독교적’ 사유의 틀을 기반으로 하는 이론적 맥락을 재구축하고 있다. 그는 특히 유대주의 사상가 로젠츠바이크와 씨름하면서, 알랭 바디우 그리고 조르조 아감벤과 함께 사도 바울과 프로이트 그리고 벤야민 사이의 강력한 연계를 주장한다. 한편 지젝은 ‘윤리의 귀환’을 이끈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논쟁하면서 현상유지가 목적인 인간을 가리키는 니체의 개념을 빌려 그의 윤리를 “마지막 인간”의 윤리라고 평가절하 한다. 그는 “마지막 인간”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는 구성적인 개념으로 “비인간”이라는 실재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이들 세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은 ‘이웃의 정치신학’은 칼 슈미트의 ‘적과 동지의 정치신학’을 대체하지 않고 단지 보충할 뿐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게 슈미트의 정치신학이 전체의 판을 짜는 예외와 일반 혹은 특수와 보편의 변증법에 의해 규정된다면, 이웃의 정치신학은 ‘비전체’의 논리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정확히 라캉의 성구분(sexuation)공식을 따르는 구조이다. 슈미트의 정치신학이 공식의 남성편에 해당된다면, ‘이웃의 정치신학’은 여성편에 해당된다. 라캉의 공식에서도 여성의 논리는 남성의 논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환상은 횡단해야 하는 것이지 우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의 정치학’이 아니라 ‘이웃의 정치신학’인가? 그것은 아마도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관한 통찰을 수용하는 동시에 정신분석적 정치의 공로를 프로이트에게 돌리기 위함일 것이다. 프로이트는「문명과 그 불만」에서 성서의 이웃사랑 계명에 관하여 사유하면서, 이웃을 단지 우리의 동일시의 대상인 ‘동료 인간’을 넘어 동일시가 불가능한 실재적 대상임을 통찰하였다. 라캉은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통찰을 발전시켜 “자신의 증상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태도를 정신분석적 윤리로 제시하였다. 이는 대타자의 부재와 대면하여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 하에 삶과 세계를 재정하는 주체의 삶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신약성서의 예수는 ‘이웃사랑’을 ‘하느님사랑’과 병치시키는 동시에 ‘이웃’을 유대인에게 동일시가 불가능한 대상인 ‘사마리아 사람’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신분석적 윤리의 초석을 놓은 셈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라캉주의 정치철학의 요체는 부르주아에게 포획된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보존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 개념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민주주의를 넘어 모종의 실현 가능한 기획을 발전시킬 용기를 갖는 대단히 위험하지만 필수적인 제스처이다. 이 책은 이러한 제스처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으로서 그 이론적 정초를 놓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