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시작된 일들,
어느새 다가온 격렬하고 위험한 세계,
그 안에서 흔들리는 화자들의 정념
201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임승유의 첫번째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슬픔을 슬프지 않게 그려내는 여유”와 “날카롭게 번뜩이는 이지(理智)가 과하지 않게” 녹아 있다는 평을 받으며 등단한 임승유의 시 51편이 담겨 있다. “사라져버리지 않기 위해 웅얼거리는 모든 존재들을 한꺼번에 이해했”고, “그 웅얼거림을 받아 적기 시작했을 때 시적인 것들이 만들어졌다”는 그의 다짐처럼 이번 시집은 명확한 소리가 없는 사건들에 시적 목소리를 부여하는 시들로 채워졌다.
해결하지 못하는 자들이 시를 쓴다. 정리할 수 없는 자들이 시를 쓴다. 놓여나지 못하는 자들이 시를 쓴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혹은 쓰고 난 뒤 우리는 불행 가운데 존재하는 삶의 작은 기척 하나를 손에 쥐게 된다. 시의 힘은 거기에 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마지막 구원의 일은 언제나 시가 떠맡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임승유의 시를 읽는다._박상수(문학평론가)
낯선 곳으로 ‘훅’ 발을 들이는 여자아이,
금지되었기에 더욱 매혹적인 세계
“친척 집에 다녀와라”(「모자의 효과」)라는 시구로 시집의 문이 열린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여자아이에게 친척 집에 가보라 말하고, 여자아이는 조심스레 문 밖으로, 그리고 임승유의 시 속으로 빨려든다.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화자의 첫 발걸음은 임승유 시 전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약국 가자고 말하는 이를 따라 소풍가듯 따라나서는 이(「우리 약국 갈까」), 잠 속으로 들어간 소년(「밖에다 화초를 내놓고 기르는 여자들은 안에선 무얼 기르는 걸까」), 그곳으로 가자고 말하는 너(「하고 난 뒤의 산책」) 등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이 곧 시가 낯선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과 곧잘 일치하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다
온몸을 던져 만들어내는 흰색들
티스푼으로 몇 날 며칠을 저어도
이상해요
달콤한 당신을 보면
나는 당신의 두 손을 만져보고 싶어져요
혼자 뒤뜰에서 벙그러지는
아름다운 꽃들처럼
―「그러나 나는 설탕은 폭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분
사탕을 녹여 먹고
오늘의 날씨에 안감을 대면
앞다투어 아이들이 뛰어오고
뛰어오면서 녹는다
키스처럼
―「우산」 부분
시집의 화자가 발을 들여놓는 세계는 어떤 곳일까. 문학평론가 박상수는 임승유 시집을 읽으면 “각설탕”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생각만으로도 혀가 녹는” 각설탕, “금세 기분이 달콤해진다는” 각설탕. 즉, 임승유 시집 전반에 자리잡고 있는 세계의 핵심은 ‘각설탕 같은 달콤함’인 셈이다. 이 세계는 ‘사탕, 케이크, 망고, 만다린주스, 포도, 앵두’ 등 끈적하면서도 새콤달콤한 시어들로 다양하게 변모하며 등장한다.
사촌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여긴 모르는 곳 구름과 이불 이불과 구름 잘못된 발음을 할 때처럼 죄책감이 들어 풀잎과 꽃잎 꽃잎과 풀잎 우린 그만큼 가까운가요? 풀숲의 기분으로 달려도 도착하게 되지 않는다 모자 속에서는 나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모자의 효과」 부분
이 각설탕의 세계를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모자의 효과」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친척 집에 도착한 화자 ‘여자아이’는 “사촌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이는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화자가 경험한 이 일련의 과정은 “짓이겨지는 풀잎” “짓이겨지는 꽃잎” 같은 이미지와 함께 예기치 못한 성적 침입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이채로운 것은 암시적인 성적 행위들이 고통스럽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 안의 과정은 발랄하면서도 순진무구한 어조로 씌어지고 있는데, 이를 두고 박상수는 “사건에 비스듬하게 연루된 자의 공동 책임 내지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정서가 들어 있다”라는 해석을 더했다. 다시 말해 화자가 이제 막 도착한 각설탕의 세계는 “불길하면서도 에로틱”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할 만큼 ‘금지’된 곳이지만 완전히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인 곳으로 화자를 흔들고 있다.
욕망을 제어하는 시적 언어
한없이 반복되는 시간, 사건, 감정 들
끊임없이 빠져들 것만 같던 감정들은 임승유 특유의 감각으로 제어된다. “풀잎과 꽃잎 꽃잎과 풀잎 우린 그만큼 가까운가요?” “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 중에 뭐가 더 진할까? 피는 물보다 진할까”와 같은 말들은 사건이 무르익은 시점에 등장하는데, 얼마큼 가까운지, 무엇이 더 진할지를 묻는 “계측의 언어”로 시의 흐름을 뒤바꾸며 “뜨거운 정서를 식히”는 역할을 해낸다. 이렇게 형성한 사건과의 거리감은 곧, 각설탕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위험함을 인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달콤한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어 죄책감마저 놓아버리기 직전, 스스로를 제어하는 힘이 화자를 일깨운다.
망보는 벽을 세우고 더 들어가면 여긴 구멍 들어가본 적 없어 나오는 방법을 모르는 백 년 동안의 소용돌이 단 하나의 점을 향해 휘몰아치는 정신을 쏙 빼놓으며 튀어나오는 쥐가 있고 꼬리를 잘라도 계속되는 몸 끝나지 않는 종아리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머리카락 줄지 않는 피부 한 번은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혼자서 들어갔다가 여럿이 되어 나온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많은 몸이 왜 필요해 손등에 종아리에 불을 놓아 태우고 까맣게 모여 있는 그림자들
-「장소의 발생」 부분
화자는 망보는 벽을 세우고 들어간 구멍에서 소용돌이 하나를 만나고 여럿이 되어 나온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많은 몸이 왜 필요해”라는 말은 “나는 기필코 너를 사랑하고야 말 것이다”(「지구의를 돌리고 있으면」)라는 말과 어우러져 마치 ‘더 잘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의 반어법처럼 들린다. 혼자서 들어갔지만 여럿이 되어 나오는 세계,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아이를 낳았지”(「모자의 효과」)라는 자기 고백은 아무리 스스로를 제어해도 기어코 다시 빨려들어가는 세계에 대한 화자의 강렬한 정념이 아닐까.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라는 제목에서 “다음엔 내가 너의 아이로 태어날게”로 이어지는 시인의 말은 사건의 발생과 회귀가 순환될 것임을 암시하는데, 이는 또다시 “이곳에서 일어날 일은 이미 다 일어났다. [……] 매번 처음 겪는 것처럼 두리번거림은 반복되고./시간에 붙들린 사람은 그런 식으로밖에는 안 된다는 걸.”이라는 뒤표지의 산문으로 이어지면서 이 암시에 힘을 더하고 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이지만 겪을 때마다 매번 처음 겪는 것처럼 새롭고, 계속해서 발생하는 이 순환은 임승유 특유의 경쾌한 감각과 어우러져 우리를 시집 속 각설탕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희망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었고, 또한 그것은 계속해서 한없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년을 두 번 만났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