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류성룡이 없었다면 성웅 이순신도 거북선도 없었다 우리는 ‘임진왜란’ 하면 누구를 떠올리는가? 십중팔구는 영웅을 넘어 ‘성웅(聖雄)’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고, 그다음으로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 의병을 이끈 ‘홍의대장’ 곽재우 등을 떠올릴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지금의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도체찰사를 맡아 전쟁을 진두지휘한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류성룡이 없었다면 그 참혹한 7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까? 정읍 현감(종6품)이던 이순신을 품계를 무려 6단계나 끌어올려 전라 좌수사(정3품)로 발탁한 이도, 형조 정랑(정5품)이던 권율을 4단계 끌어올려 의주 목사(정3품)로 천거한 이도 바로 류성룡이다. 그래서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한 것이 나라를 중흥한 기틀”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류성룡이 없었다면 전황을 반전시킨 행주대첩, 한산대첩, 명량대첩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훨씬 더 오래전에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징비! 과오를 반성해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혹독한 전쟁이 끝난 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류성룡은 한 권의 책을 저술한다. 바로 (국보 132호)이다. 책 제목에 책을 저술한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징비’는 의 ‘소징(小徵)’이라는 자구에서 빌려온 것으로, ‘자신을 비롯한 선조들의 과오를 징계하고 후손들이 선조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뜻이다. 다시는 이러한 전란을 당하지 않으려면 잘못을 반성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저술한 것이다. 이렇게 류성룡은 만년에 저술한 <징비록>에서 ‘일본은 다시 쳐들어온다’고 분명하게 경고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의 선견지명을 살리지 못하고 4백 년 후,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겪게 된다. 한일 간의 여러 현안이 다시 대두되는 현대에 류성룡의 이야기는 역사의 생생한 교훈이 될 것이다. 왜구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병든 몸으로 전장을 진두지휘한 류성룡이 남긴 기록과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반성해야 한다는 따끔한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류성룡의 생애와 임진왜란의 전황을 생생하게 살려내다 <소설 징비록>은 <징비록>을 바탕으로 류성룡의 전아한 생애와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생생하게 살려낸 역사소설이다. 류성룡은 전아(典雅)한 선비였다. 류성룡은 권력을 잡았지만 남용하지 않았고, 부를 보고도 청백리로 근신했으며, 언제나 학문과 교육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류성룡은 공자의 중용을 실천한 사람이다. 당파 싸움이 치열한 선조 시대에 그는 오히려 정적들과 공존하려고 했고, 중용의 정치, 상생(相生)의 정치를 했다. 퇴계 이황은 21살의 젊은 류성룡은 만난 뒤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극찬했으며,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4대 수제자 중 한 명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서애는 나의 스승”이라며 류성룡보다 자신을 낮추기도 했다. 세종 이후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정조는 류성룡을 가리켜 “신묘한 지혜[神機]와 먼 앞일을 헤아리는 능력[遠慮]이 참으로 우리나라의 유후(留侯, 장자방)”라고 평가했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한 천재 지략가 정도전도 듣지 못한 ‘조선의 장자방’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소설 징비록>은 이렇듯 역사적 공헌과 위상에 비해 과소평가 받아온 류성룡의 다양한 면모와 국난을 극복해내는 눈부신 활약상을 보여준다. 아울러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 장면을 흥미진진하고 생생하게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