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서 꿈을 꾸는 자’ 정영문의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나는 상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정영문의 모토다.
1996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실제와 상상의 경계를 가없이 넘나들며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정영문이 신작 장편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11)를 출간했다. 문학과지성사가 지난 2010년 초봄부터 운영해오고 있는 문학.인문 웹진인 <웹진문지>http://webzine.moonji.com를 통해 2011년 1월부터 3개월간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작가가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0년 봄여름 두 계절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며 쓴 일종의 체류기인 동시에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이기도 하다.
『어떤 작위의 세계』는 과거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의 기억과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지만 5년이라는 시간의 단절이 그리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작가 자신인 동시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인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과거 여자 친구 그리고 그녀의 현재 남자 친구와 잠시 함께했던 때를 떠올린다. 당시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함께 데킬라를 마셨고, 황량한 벌판에 있는 그녀의 별장에서 용설란을 쏘거나 집 안에 들어온 전갈들 내보내기도 하고, 언덕에 올라 들판을 내려다보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러던 중 ‘나’는 불쑥 떠난 짧은 여행에서 안개가 좋다는 이유로 그들과 헤어져 샌프란시스코에 며칠 더 머물며 워싱턴 광장 공원에서 호보를 만나기도 하고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상상 등을 하며 짧은 시간을 보낸다.
5년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나’는 워싱턴 광장 공원에서 예전에 만났던 호보와는 다른 호보를 만나 다시 예전에 했던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상상을 만든다. 같은 공원에서 체리에게 무겁고도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은 늙은 아시아계 남자가 조용히 체리만 바라보며 그것을 먹는 것을 의아해하기도 하고, 무수히 많은 “완전히 맛이 간 자들”이 왜 샌프란시스코의 관광 안내 책자에 등장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과일들을 금문교 밑으로 떨어뜨리려다가도 도무지 의욕이 없어 상상만 하고, 늙은 개와 함께 사는 역시 늙은 히피의 일상을 그와 한 번도 대화해보지 않았음에도 태연하게 글로 펼쳐 보이는 등 소설 도처에서 우리는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기 어려운 작가의 생각 혹은 상상의 산물들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작위의 세계』에는 뚜렷한 플롯이 없다. 이 소설은 표류기에 가까운 체류기인 동시에, ‘나’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관념과 실재가, 사실과 상상이 공존하는 정영문식 상상의 박물지이기도 한 것이다. 내면과 세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도 아니고 모험이 함께할 여정의 출발점 또한 아니다. 모든 것은 ‘나’의 상상의 원천이자 ‘어떤 작위의 세계’ 그 자체다.
언젠가부터 그런 식으로, 어떤 순간을 순수하게 경험하기보다는 그 순간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의식하며, 의식과 감정까지 조작하며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어떤 잘못처럼 여겨졌고, 나 자신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뻔한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편안함은 내가 어떤 작위의 세계 속 한가운데 있기에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 _본문 중에서
한편 에드거 앨런 포는 그의 사후에 출판된 『시의 원리』에서 플라톤 시대 이후 세 개의 주된 영역으로 나뉘어 있던 이른바 ‘선한 것the good’에 관한 도식―예술, 미, 정서, 취미 등의 세계가 중심에 있는―을 자기만의 도식으로 재구성했다. 포의 도식에서는 순수 지성과 취미 그리고 도덕적 감각이 새로운 위상을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취미가 중심에 놓여 있는데, 포는 “취미는 정신에서 이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어떤 작위의 세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비탈에 돌멩이를 굴려 내려가게 하거나 숫자를 세는 것을 취미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가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상상하고 어떤 존재나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거나 혹은 이론을 정립하는 일이다. 이를 취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물이든 풍경이든 그것들이 내 안에서 또 다른 기억과 상상 속으로 전이되며 다른 차원에서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나는 그것들에 동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이론을 세우며 즐거워하고, 궁상에 대한 궁상맞은 생각을 하며 나름의 이론을 펼친다.
이론을 향한 ‘나’의 애정은 길에 버려진 소파를 두고서 어린 금발머리 여자아이와 승강이를 한 후 복수에 대한 생각을 전개하는 대목에서 재확인된다. 복수에 일반적인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는 이로 갚는 법칙lex talionis’일 텐데, 오히려 ‘나’는 “누군가에게 당한 후 자신이 당한 만큼, 혹은 그 이상이나 이하로 그 누군가에게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갚아주는, 일종의 복수의 이상한 전이가 보다 일반적”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소설을 쓰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고 여긴다.
나는 마요네즈와 금발 여자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설에 대한 복수와, 무와 무의미, 그리고 존재의 근거 없음에 대한 복수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처절한 복수를 되새기며,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더욱 기이한 생각들을 하며 더욱 기이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_본문 중에서
상상 속의 상상, 꿈속의 꿈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나’가, 그리고 작가 자신이 그런 상상들을 했다는 것뿐이다. 정신이 지니고 있는 “유희에 대한 어떤 끈질긴 욕망의 산물”이기도 한 상상은 글쓰기로 이어지고 소설로 구현되기에 이른다. 유효하지 않으나 유효성을 잃지 않은 상상을 토대로, 무의미하지만 바로 그 무의미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소설이 바로 『어떤 작위의 세계』인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무의미성이 감추어지지 않은, 아무것도 미화되지 않은 적나라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럼으로써, 아무런 두려움도 희망도 갖지 않는 이 시선의 마성적 장악력은 무의미성에 형식의 위엄을 부여한다. 즉 무의미성이 무의미성으로서 형상이 되는 것”이라 한 바 있다. 이 소설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태환 또한 “그는 무의미하고 근거 없는 생각과 소설을 가지고 존재의 무의미함과 근거 없음에 대한, 또는 무의미하고 근거 없는 소설과 이 세계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는 셈”이며 이는 “무의미로 무의미와 대결하는 역설”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무의미에 예술의 무의미로 대적하는 것은 이 세계가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전혀 없다는 권태롭고 절망적인 인식에 도달한 작가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비타협적 저항의 방법일 것이다. 일군의 후근대적postmodern 작가들에 대한 페터 V. 지마의 인식은 정영문에게도 타당해 보인다. “그들은 소망스러운 기존 질서의 대안이 유토피아의 본래 의미, 즉 존재하지 않는 곳임을 인식한다”(『모던/포스트모던』, 문학과지성사, 2010, p. 384). 정영문의 작가-화자는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