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보이지 않는 영화를 본다는 것
영화평론가 김소영의
실종된 한국영화 지도 그리기
식민지시대에 제작된 영화는 대략 180여 편이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영화는 28편에 불과하다. 한국 최초의 영화라고 하는 키노드라마 <의리적 구토> 역시 전해오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식민지시대의 조선영화는 지금의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영화와 영화사를 이야기해야 하는 평론가는 늘 곤혹스럽다.
영화평론가 김소영은 대부분의 영화평론이 ‘보이는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굳이 ‘보이지 않는 영화’를 말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김소영은 ‘보이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도 ‘보이지 않는 영화’를 끌어들이고 불러낸다. 또한 그는 영화를 평가와 분석의 대상으로만 삼지 않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한국영화 최고의 10경』과 『근대의 원초경』은 그가 한국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근대의 원초경: 보이지 않는 영화를 보다』
『근대의 원초경』은 ‘보이지 않는 영화’를 텍스트로써 복원하여 한국영화사의 비어 있는 풍경을 좀 더 선명하게 채색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 근현대사의 기록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풍경들을 설치한다. 이 작업은 바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원초경(유년 시절에 겪는 충격적인 첫 장면)’을 파헤치는 작업과 비슷하다. 식민 지배,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으로 인해 기억의 아주 깊은 심연에 파묻혀버렸던 우리 영화사의 유년기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 혹은 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
식민 지배에 따른 조선 영화의 실종과 한국 전쟁과 군사 독재에서 기인한 한국 영화의 체계적이지 못한 아카이빙, 이론적 참조 틀의 상대적 부재로 저자는 지난 17년간 한국 영화 연구에 있어 “생산적 곤궁”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실종과 궁핍과 부재 속에서 보여야 할 영화, 자명한 가시성을 그 존재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역설적으로 비가시화된다”라고 지적한다. 이어서 이론과 비평이 이런 비가시적 영화를 가시화할 수 있는지, 보이지 않는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답을 찾기 위한 저자의 고민은 곧 조선 영화의 부재와 그 ‘불연속’의 조선 영화와 한국 영화사에 대한 대안적 역사 연구 방법, 한국 영화에 대한 이론과 비평이 빈곤한 속에서의 텍스트 분석 방법, 비교 연구 방법의 숙고로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영화, 혹은 잃어버린 영화를 찾기 위한 저자의 해답은 식민지 이후의 아카이브를 절망의 근원, 즉 영화사 연구를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장소로 간주하기보다는 비서구 식민 후기 영화사의 대안적 방법론을 찾는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제1장 근대의 원초경
장면을 경으로 치환한 근대적 원초경은 사진과 함께 영화를 기계복제 이미지라고 할 때 바로 그 기계복제 이미지들, 그리고 영화 스크린에 투사되는 프레임의 그 격자에 의해 구조화된 비전으로 구성된 근대 시각장과 주체의 기원적 순간, 조선영화의 첫 장을 가리키는 포괄적 의미다.
「한국 영화의 원초경: 사진 활동, 계보, 계모」는 조선 초기 영화 형식인 키노드라마/연쇄극을 “조선 관객에게 ‘조선’의 문제를 두고 말을 거는 활동사진을 포함하는 키노드라마라는 조선 영화 생산의 첫 장, 근대적 원초경”으로 정의한다. 특히 조선 영화의 기원 지점, 초창기 영화사에 ‘원초경’을 하나의 방법론이자 전망으로 도입해 형용역설인 비/가시적 영화(In/visible cinema)로서의 조선 영화를 이론적·역사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는 실마리로 설정하고 있다.
또한 「신여성의 시각적·역사적 재현」에서 신여성이라는 시각적·역사적 재현을 조선 영화의 원초경 속에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데, 신여성을 영화나 잡지의 삽화나 그림, 문자적 포착으로 구성된 재현에 기반해 분석하기보다는 ‘재현 속의 현시(presentation in representation)’이며 수행적 기호로 보고, 재현물로서의 신여성과 실재한 역사적 주체 신여성 사이의 당대적 결합,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여성’을 둘러싼 의미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 영화사를 조선, 해방, 남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분절해 기술하고 작가와 제작 중심의 영화사를 탈중심화시키는 하나의 예로, 조선 영화사 부분을 애활가와 극장을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 영화라는 ‘내셔널’ 시네마: 애활가와 부인석」은 조선 영화라는 내셔널 시네마에 관한 ‘원초경적 접근이다.
「한국영화사와 <취화선>」은 도래할 영화의 시대를 앞에 둔 전(pre) 영화적 상상력을 장승업에 투사한 영화사의 전사(前事)로 <취화선>을 읽고 있다.
「유예된 모더니티:한국 영화들 속에서의 페티시즘의 논리」는 페티시의 세 가지 번역의 과정―주물, 물신, 연물―그리고 그 궤적과 한국 영화사를 관통하는 핵심 비/동력인 유예된 근대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2장 한국사회의 트라우마와 젠더
이 장에서는〈운명의 손〉이라는 한국전쟁 직후〈공동경비구역 JSA〉에 해당할 영화로 미군정 이후 훼손된 주권과 맞물린 역사적 트라우마와 남성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운명의손〉과〈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그리고〈쉬리〉로 이어지는 이 계보는 해방 이후 한국 영화에 재현되는 트라우마에 얽힌 남성성에 대한 부분적 지도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인데, 이는 〈박하사탕〉〈살인의 추억〉〈텔미썸딩〉과〈공동경비구역 JSA〉를 분석한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와 젠더」「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의 동성사회적 판타지」에도 이어진다. 변영주 감독의 종군 위안부 3부작 중〈숨결〉을 역사적 트라우마와 여성을 다루고,〈텔미썸딩〉을 뒤집어 딸이 아버지의 이름을 어떻게 지우는가를 청계천이라는 후기 독재 공간의 정치성과 접목시켜 다루고 있다. 「1950∼60년대 ‘고백’ 영화」은 제1장「신여성의 시각적·영화적 재현」에 이어 나혜석의 이혼 고백장을 기억하고,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 드러나는 고백 담론이 한국전쟁 이후 전도의 메커니즘을 거쳐 어떻게 여성 주체를 다시 쓸 수 있게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제3장 지정학적 판타지
「지정학적 판타지와 상상의 공동체:냉전 시기 대륙(만주)활극 영화」는 만주활극, 대륙활극이라고 알려진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 그리고 임권택 감독의〈황야의 독수리〉 등이 냉전 시기 ‘만주’라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혼성공간을 불러와 구성한 당시 국가주의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거부, 저항을 읽는다. 이 영화들은 국민국가의 상상적 공동체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요구하는 정체성을 횡단하고 넘어서는 ‘지정학적 판타지’를 통해 일종의 트랜스 크리틱을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콘택트 존으로서의 장르:홍콩 액션과 한국 활극」은 한국 영화 연구가 레퍼런스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으로서의 (서구) 영화이론, 특히 서구 영화 중심적 장르론을 슬쩍 벗어나, 또(서구 중심적) “비교의 유령”의 그림자를 비켜나 콘택트존으로서 한국의 활극, 액션영화를 간주하고 홍콩액션영화와의 비교를 통해 인터아시아적, 트랜스아시아적 비교의 틀을 만들어보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