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위대한 초국가적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
“시의 진정한 본질은 연대의 정신과 공동 언어를 향한 소망이다!”
20세기 이후 미국 현대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선집 『문턱 너머 저편』(대산세계문학총서 103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가능성의 세계를 꿈꾸며, 변화를 향한 의지와 연대를 항한 소망을 노래하는 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페미니스트 시인으로서 여성의 아픔을 진단하고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시선을 제시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적 본질을 드러낸 리치는, 페미니스트 시인의 범주를 넘어 여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이름과 위치를 점한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가부장적 사회의 침묵 속에서 구해내는 시를 쓰는 데 몰두해왔다.
리치의 시는 페미니스트적 · 레즈비언적 · 역사주의적 · 비자본주의적 · 인본주의적 · 다인종적 · 다문화적이라는 표현이 모두 어울릴 만큼 다층적이다. 단정하고 서정적인 정서가 돋보이는 정형시로부터 자유분방한 실험 정신이 엿보이는 자유시, 그리고 서사시인의 혜안과 예지가 돋보이는 장시에 이르는, 그야말로 다양하고 무변한 시의 형식도 리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다층성을 반영하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 영문과 교수로 19~20세기 미국 시문학을 연구한 앨버트 겔피는 이런 리치를 가리켜 서정시인의 개인적 · 고백적 목소리를 넘어서는 시인이며, 민중시인으로서 공적이고 대변자적 목소리를 가진 미국의 대시인 월트 휘트먼의 계보를 잇는 현대시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개인의 시련을 넘어,
시인의 임무를 가슴에 담고 일군 시 세계!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삶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29년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리치는 엄격한 부모의 철저한 훈육으로 어린 나이부터 독서하는 습관을 들여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지적으로는 조숙했지만 신체적으로는 병약했던 리치는 일찍부터 ‘틱’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22세 때 심한 관절염을 앓은 뒤 평생을 지팡이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던 앨프리드 콘래드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 생활은 불행하게 끝이 났다. 아이 셋을 낳았지만 리치는 레즈비언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며 이혼을 요구했고, 콘래드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고 만 것이었다. 이후 세상의 편견과 비난, 수차례에 걸친 관절염 수술과 척추 수술 등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리치는 고통스러운 삶과 시련을 소재로 삼아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존재를 화두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완성해가게 된다.
올해로 정확히 60년간 시를 써온 리치의 깊고 넓은 시 세계는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그 첫 시기는 1950~80년대로, 이 시기에 『세상 바꾸기』(1951), 『며느리의 스냅사진들』(1963), 『생존을 위한 필수품』(1966), 『소엽집』(1969), 『변화를 향한 의지』(1971),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1973), 『공동 언어를 향한 소망』(1978) 등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이 시기에 리치는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자신과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회적 소수자의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며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페미니스트 시인의 독립적이고 당찬 목소리로 가부장적 사회에서 ‘생각을 가진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사유한다. 또한 이기주의와 불신이 팽배하고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구세대의 가치로 전락해버린 시대를 바라보며, 성 · 인종 · 계급의 갈등과 분리를 넘어서서 타자와 연대를 맺으려는 소망 그리고 공통된 어떤 것을 나누려는 소망을 가질 것을 차분하게 설득하기도 한다.
1980~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며 『미칠 듯한 인내심으로 여기에 오기까지』(1981), 『문턱 너머 저편』(1984), 『당신의 조국, 당신의 삶』(1986), 『시간의 힘』(1989), 『난세(亂世)의 지도』(1991), 『공화국의 어두운 들판』(1995), 그리고 『미드나이트 샐비지』(1999)를 연이어 출간했다. 그런데 이 시집들에 깃들어 있는 전반적인 정서는 더 이상 변화에 대한 신념과 확신에 찬 열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간의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변혁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대중매체가 선도하는 상업적 오락주의가 떠받들어지는 미국 사회의 경박함에 대한 절망감과 회의가 그 주조를 이룬다. 의식의 재구성과 사회변혁을 위해 그간 자신이 기울여왔던 노력의 가치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나약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리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사로잡혀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을 그만 용서하기로 한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시인의 임무를 되새기며 용기를 내어 『여우』(2000), 『폐허 속의 학교』(2004) 그리고 『미로에서 울리는 전화』(2007)를 출판한다. 이 시집들에서 리치는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잔잔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시를 통해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리치는 시인으로서 예술적 창작의 고민과 씨름하고, 미국 시민으로서 조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세계 시민으로서 전 지구적 착취와 억압의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리고 지금도 다양한 이익을 가진 집단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관계 맺음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가장자리에서 불을 비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리치는 전미도서협회상, 전미시인협회상, 래넌 재단 평생공로상, 예일 청년시인 상, 리즐리 토런스 기념상, 코먼웰스 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받았다. 1994년에는 국가예술훈장 서훈자로 지명되었으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보장을 축소하는 클린턴 정부의 정책에 항의해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였다.
리치의 시는 독일, 일본, 스페인, 스웨덴,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서 20개 언어 이상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의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시선집 『문턱 너머 저편』은 미국의 W. W. 노턴 앤드 컴퍼니에서 2002년 출간된 The Fact of a Doorframe: Selected Poems 1950-2001을 번역한 것으로, 리치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시 114편을 수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