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자본 내부에서 전개되는
대항 투기의 가능성
금융의 전면적인 지배에 좌절해 우울에 빠지는 대신
금융화가 생산한 ‘피투자자’라는 조건에 거주하면서
동시대 자본주의에 도전할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이론적, 실천적 기획
2008년의 대침체는 금융의 위력과 위험을 각인한 사건이었다. 체계 자체를 뒤흔든 위기의 여파로 각국 정부는 무분별한 금융 기관을 비난하며 규제를 약속했고, 분노한 대중은 ‘1퍼센트에 맞서는 99퍼센트’를 외치며 월스트리트 같은 상징적인 장소를 점령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신자유주의는 돌이킬 수 없이 침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았다. 위기를 수습하고 ‘정상’ 상태로 돌아가자 오히려 더 강고해지기까지 했다. 정부들은 애초 공언과 달리 시민을 희생시켜 은행을 구제했고, 그렇게 살아난 은행들은 자신을 구해 준 정부의 재정 상태를 우려하며 재차 긴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점령 운동의 물결도 곧 사그라들었을 뿐 아니라 ‘99퍼센트’ 중 상당수가 금융 회로에 포섭되었다. 노동 소득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릴 가능성이 희박해진 탓에 갈수록 많은 사람이 투자 혹은 투기에 매달리면서 주식과 부동산, 암호 화폐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후 위기가 점점 더 가시화되고 팬데믹까지 이어져 불안이 가중되고 있지만 얼핏 보기에 유의미한 변화를 요구하고 이끌 만한 세력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특히 금융은 사회 전 분야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위력을 자랑한다. 금융 기업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뿐더러 비금융 기업의 금융화도 상당히 진척되었다. 따라서 현재 기업 경영에서 가장 큰 입김을 행사하는 것은 주주와 투자자의 요구다. 정부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자국 채권 소유자의 권력에 크게 종속된 채 재정 건전화를 통해 투자자 눈에 비치는 자신의 매력도를 유지하는 데 사활을 건다. 또 금융은 개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출과 투자에 의존하며, 이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가치, 즉 신용도를 높이려 한다.
이처럼 생산과 분배, 통치와 복지, 개개인의 품행까지 금융을 통해, 또 금융을 위해 운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면적인 지배에 압도당한 채로 ‘대안 없음’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금융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역을 지켜내려는 힘겨운 싸움에 돌입해야 할까? 『피투자자의 시간』의 지은이 미셸 페어는 좌파가 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바람에 우울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두 선택지를 모두 거부하는 그가 보기에 더 유효한 대안은 금융 ‘내부’에서 금융에 맞서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저항을 그는 ‘대항 투기’counterspeculation라 부르며, 이런 저항 방식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가능함을 입증하기 위해 금융화가 생산한 ‘피투자자’investi, investee라는 주체성에 주목한다.
권력이 빚은 주체성을
그에 반하는 용도로 전유하기
『피투자자의 시간』의 지은이 미셸 페어는 벨기에 태생의 철학자이자 사회 이론가다. 유럽과 영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며 1985년에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비영리 출판사인 존 북스Zone Books를 공동으로 설립하고 현재까지 편집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또 프랑스에서는 이민 정책 관련 모니터링 그룹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학계 바깥 활동을 병행하며 통치 양식의 변화, 대안적 주체성의 가능성, 좌파 정치의 전략을 중심으로 동시대 자본주의의 정치적 풍경을 비판적으로 탐구해 왔다.
마르크스와 푸코의 통찰을 따르는 그의 논의는 두 가지 이론적 전제에 기반한다. 하나는 저항이 항상 권력에 내재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권력이 빚은 주체들이 그 지위를 전유해appropriate 권력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시대의 저항을 이해하고 이론화하려면 현재의 권력이 어떤 주체성을 생산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주된 자본 축적 및 통치 양식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결정적인 구별, 즉 신자유주의와 금융화의 구별을 제시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은 ‘주주 가치’를 기업의 핵심 과제로 격상했고, 각종 규제 완화 등을 통해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려 했으며, 개개인을 기업가적 주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지은이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자들의 의도와 결과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도래한 체제는 금융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신자유주의와 금융화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으며 때로는 동의어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주체성 형식을 낳는다. 신자유주의가 각자의 삶을 하나의 사업처럼 대하는 자립적인 기업가를 양성하고자 한 반면, 막상 금융 권력이 헤게모니를 쥐고 나자 우리 대다수는 자립은 꿈도 꿀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투자를 받기 위해 경제적, 비경제적 신용도를 끌어올리려 분투하는 피투자자로 살아간다.
투자 권력에 완전히 종속된 듯이 보이는 피투자자들이 과연 반격에 나설 수 있을까? 하지만 지배가 아무리 물 샐 틈 없어 보이더라도 언제나 균열이 있으며 저항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지은이는 전통적인 노동-자본 대립이 약화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갈등이 부상했다고 말한다. 소득 분배가 아니라 ‘신용 할당’을 둘러싼 전선이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투자자의 시간』은 기업 경영, 국가 통치, 개인 품행이라는 세 영역에 초점을 맞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신용이라는 무기를 활용할 방안을, 또 현실에서 활동 중인 피투자자 운동이 기존 운동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제시한다.
임노동자에서 이해 관계자로, 임금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 주주 가치를 신봉하는 기업 경영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1장 「기업 거버넌스의 이해 관계」는 금융화로 인해 기업의 목표가 이윤 추구에서 주주 가치 추구로 이동했음을 강조하며 기존의 자본가-노동자 관계와는 상이한 권력 관계가 부상했다고 주장한다. ‘신용 할당’ 권력을 보유한 투자자와 자신의 매력도를 높이고자 애쓰는 피투자자의 갈등이 첨예해진 것이다. 달리 말해 현재 가장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는 어떤 프로젝트가 자금을 할당받을지, 무엇이 생산될지를 결정하는 투자자와 주주다.
그러므로 지은이에 따르면 임금 노동자의 저항은 더 이상 사회적 투쟁의 유일한 중심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 운동이 모든 가치를 상실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항 투기에 나서고자 하는 피투자자들이 과거 노동 계급이 채택한 ‘전유’ 전략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 운동은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지위가 자본의 착취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임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지위를 전유했으며 자본가들의 전략을 모방했다. 그리하여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단체 협상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투자자들 역시 자신의 지위를 거부하는 대신 그 안에 거주하면서 투자자들의 기술을 차용해 신용 할당 조건들을 수정하고자 시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대항 투기’가 뜻하는 바다. “이는 다른 평가 기준을 조성함으로써, 그리고 금융 자본가들이 자연스럽게 높이 평가하는 유형의 시도들의 신용을 떨어뜨림으로써 대안적인 프로젝트들의 가치 상승을 촉진하는 것을 뜻한다”(55).
이에 따라 주된 전장도 임금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옮겨 간다. 피투자자 운동은 기존 기업 거버넌스의 리스크가 터무니없이 높음을 드러내고 노동과 인권, 환경을 보호하는 대안들의 매력도를 증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영학에서 주주stockholder와 대비되는 이해 관계자stakeholder의 지위를 전유해 이들의 요구를 하나로 묶어 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요구들을 관철하기 위해 특정 기업의 상품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