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양자역학의 초석을 놓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 철학, 역사를 아우르는 명강연의 한국어 초역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이하 『강의』)는 슈뢰딩거의 전설적인 시리즈 강연들 중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강연의 전문을 완역한 책이다.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과학과 인문주의」는 이뤄진 후 각각 1954년과 1951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에디토리얼에서 펴내는 한국어판은 1996년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블랙홀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의 서문을 붙여 합본으로 출간한 판본을 번역했다. 명강연자가 남긴 과학 고전 에르빈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시대를 열어젖힌 이론물리학자다. 1926년 ‘슈뢰딩거 방정식’을 포함한 논문을 비롯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파동역학을 정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1933)을 받았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대중 과학서로 널리 읽힌 그의 책은 양자역학이나 일반 물리학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과학 고전으로 사랑받은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가 대표적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근원을 궁구하는 물리학자의 태도도 엿볼 수 있지만 아무튼 그 책은 생명과 유전 현상을 다루며, 살아 있는 세포의 핵심을 “비주기적 결정”(aperiodic crystal)으로 상정하고 그 구조를 물리학적으로 추론하면서 생명 현상의 특성과 유전물질에 관해 독특한 설명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후, 이 책의 내용 중 명백한 오류들이 지적되었지만 강연과 출판이 그 전에 이뤄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활자화되어 호평을 얻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슈뢰딩거 책들은 강연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과학과 인문주의」 『강의』에 수록된 두 편의 강연 중 「자연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하 「철학자들」)은 1948년5월24, 26, 28, 31일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진행된 네 차례의 대중 강연이 토대가 되었으며, 책으로 출간된 해는 1954년이다. 「과학과 인문주의」는1950년2월 더블린고등연구원에서 4회에 걸쳐 진행된 시리즈 강연 ‘인문주의의 구성 요소로서의 과학’의 출판본이다. 슈뢰딩거는 「철학자들」에서 과학적 세계관의 근본적인 특성을 도출하고자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과 과학이라는 사고체계의 특수성과 연관된 몇몇 학파의 학설을 조사한다. 과학(물리학)에서 그러한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기초과학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이 고대의 철학과 과학에 닿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 당시에 유럽 학술계에 형성된 이러한 회고적 연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물리학자의 시각에서 포착해낸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과학과 인문주의」도 「철학자들」의 기본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런 바탕에서 고대의 자연철학 이래 수천 년간 물리학이 다뤄 온 ‘물질’이란 개념의 기본 특성을 설명하고, 그 개념에 내포된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논제들의 난점과 모순 등을 자세히 다룬다. 과학은 그리스인의 발명품이다 슈뢰딩거가 여러 고전학자의 주장과 다양한 문헌을 검토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을 가져와보자. ¶ 근대과학을 주조한 사상가들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음을 […] 고대 과학과 철학을 진심으로 되살리고 계승했습니다. _37쪽 ¶ 다음 구절은 존 버넷(John Burnet)의 『고대 그리스 철학(Early Greek Philosophy)』의 서문에서 가져왔습니다. “… 과학은 ‘그리스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_40쪽 ¶ 원자론을 근대과학에 도입한 가상디와 데카르트의 삶과 글을 보면, 우리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습 니다. 그들은 원자론을 도입하면서, 자신들이 열심히 공부했던 고대 철학자들의 이론을 (스스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고대 이론의 모든 기본 특성들이 대단히 강화되고 폭넓게 정교해져서, 그러나 변하지 않은 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대 이론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_118쪽 ¶ “과학은 그리스인들의 발명품이다.” 과학은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벗어나서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 곰페르츠(나는 그를 아주 많이 인용했습니다)는 우리의 현대적인 사고방식 전체가 그리스인들의 사고에 기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의 사고는 특별하고, 수세기에 걸쳐 역사적으로 자라왔으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거의 저항할 수 없는 마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특수성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_128쪽 슈뢰딩거는 근대과학, 특히 물리학은 고대 과학과 철학의 직계 후손이란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논점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데 있지 않다. 그가 신중하게 선택한 고전학자들의 견해에 드러나 있듯 “그리스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사고하는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에 동의하며 그리하여 그것이 물리학 이론 안에 어떤 방식으로 흔적과 영향을 남겼는지를 밝히는 데로 향한다. 원자 혹은 입자 그리고 연속체라는 문제 슈뢰딩거가 말하는 기초과학의 위기는 물리학의 위기와 동의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양자역학도 완벽하지 않았으며 그 상황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슈뢰딩거는 1961년 타계하여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여러 이론적 시도를 보지 못했다. 가령 로저 펜로즈가 서문에서 언급하는 끈이론이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통일장이론, 대통일장이론, 만물이론, 최종이론 등 입자와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적 시도들이 진전을 보았지만, 어느 것도 실험적으로 완벽히 입증되지 않고 있다.) 슈뢰딩거는 파동방정식을 고안하여 양자역학의 이론적 기틀을 놓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바로 그 1920년대는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로 방출된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나타난다는 광양자 가설을 주창하며 시작된 양자역학의 중심 이론이 결정되려던 시기였다. 경합을 벌이던 양 진영의 한편에는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1927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의 승자는 닐스 보어였다. 보어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해석에 끝까지 반대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불확정성 원리의 확률론적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연속체와 결정론을 고수하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오랜 기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슈뢰딩거는1부 1장에서(34쪽부터)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 일으킨 사유의 혁명보다 자신이 더 주목하는 바를 밝힌다. 양자물리학도 실은 근대과학이 계승한 고대 과학과 철학의 기본 개념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미처 발견되지 못한 “선입견이 포함된 관념들과 부적절한 가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요소들을 분명히 인식한 슈뢰딩거는 이론학자로서 어떤 한계에 봉착했음을 자각했으며 물리학의 위기는 정교한 이론 속에 고착되어버린 고대의 유산을 파악하고 고치는 작업을 통해 출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자론의 대두 이후 발견된 ‘기본 입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긴 해도 고대 원자론이 상정한 ‘원자’의 개념이 수정을 거치며 확장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