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보는 맑은 시선
그 끝에 만져지는 좋은 예감
2022년 《계간 파란》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마윤지 시인의 첫 시집 『개구리극장』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마윤지의 시를 이루는 것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과 장소들이다. 시인이 호명하는 사물들을 만지고 그 장소에 함께 머물고 나면 알싸한 맛이 남는다. 맑고 간결한 시어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묻혀 있는 것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언뜻 평온한 세계에 남은 잔상. 그 잔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생생한 유년의 장면들과 해소되지 않은 죽음이 떠오른다. 한 겹 아래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인식, 묻어 둔 채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고 늦지 않게 슬픔을 건져 올리는 손길. 한여름 그늘 아래처럼, 초겨울의 아침 공기처럼 다정하고도 서늘한 마윤지 시의 촉감은 여기에서 온다.
■ 입안을 맴도는 단어들
모종은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생활은 액자, 안마기 가져가세요
―「사과는 조금 좋다」에서
마윤지의 시를 읽다 보면 단어들이 자꾸 맴돈다. 입안에서 말들을 굴려 보게 된다. 방울토마토 흑토마토 블루베리 딸기 같은 제철 과일. 액자 안마기 사탕 산책 같은 생활의 말들. 포천, 연천, 괴산, 지명과 수요일, 가을, 동지(冬至) 같은 시기. 여름 방학 운동회 스키 캠프 소원 약속 같은 어린 시절 전부였던 말들. 마윤지 시인은 익숙한 단어들을 꺼내서 새롭게 발음해 보도록 만든다. 되뇌는 동안 생경한 감촉으로 떠오른 단어들은 읽는 이를 낯선 데로 데려간다. 기억 속에 가라앉은 장면들이 상연되는 극장으로.
■ 죽음을 상영하는 극장
나는 극장에서 사람 구경을 자주 해요
사람들이 어둠 뒤에 숨어 울고 웃는 걸
반짝이는 죽음이라고 이름 붙였거든요
―「개구리극장」에서
개구리극장은 시인이 독자들을 데려가는 장소다. 죽은 사람이 개구리가 되어 만나는 이곳에서는 “언제든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볼 수”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어두운 극장에서 어린 시절에 했던 천진한 약속이 그때와 같은 무게로 떠오르고 오롯한 슬픔이 떨어져 나온다. 고요하고 생기로운 개구리극장에는 울고 웃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이가, 그걸 “반짝이는 죽음”이라고 이름 붙이는 시인이 있다. 떨어져 나온 슬픔을 늦지 않게 낚아 올리려는 다정하고 찬찬한 시선이다.
■ 보이지 않는 곳부터 보이지 않는 데까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
나중엔 번쩍 번개가 되는 거지
오렌지색 같은 하늘이 된다 맛도 향기도
―「동지(冬至)」에서
“보이지 않는 곳부터 보이지 않는 데까지”를 보는 시선은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감각한다. 시인은 스타팅 라인에 선 아이의 “심장의 출발”을, “도착과는 상관없는 일”을 일러 준다. 땅 아래 묻힌 죽음을 생각하며 여름 과일의 단맛을 곱씹는다. 말을 아끼고 차분하게 바라보는 시선 끝에 예감처럼 좋은 순간이 온다. “묻어 놓는 것은 숨기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많이 보고 만지기 위함이라는 태도는 그것들이 “번쩍 번개”가 되고 “오렌지색 같은” 맛과 향을 낸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계절이 바뀌기 전에는 바람이 불 것이고, 분명 무언가 남아 있을 것이다. ‘장독대 안의 매실’ 같은 작지만 단단한 것이. 오래 귀 기울인 이들에게 찾아온 약속이다. “나타나기 전에 이미 닿아 있는”, 마윤지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찾아올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