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탄생 100주년이자 10주기를 맞는 누벨바그의 마지막 감독 에릭 로메르의 연작 ‘희극과 격언’의 각본집을 출판사 goat에서 두 권으로 나누어 펴낸다. 로메르는 프랑스의 영화운동 누벨바그를 이끈 기수이면서도 감독 명성은 비교적 뒤늦게 얻었으며, 1956년에서 1963년까지 영화비평지 《카이에뒤시네마》의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발표한 ‘도덕 이야기’, ‘희극과 격언’ 그리고 ‘사계절 이야기’ 연작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로메르의 변주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꾸밈없는 일상의 성실한 기록과 통찰은 인물의 마음속에 자리한 모험심을 길어 올리며, 이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날의 날씨와 분위기가 전해진다. 에릭 로메르는 ‘희극과 격언’에 속하는 「해변의 폴린」으로 1983년 베니스영화제 은곰상을, 「녹색 광선」으로 1986년 황금사자상을, ‘사계절 이야기’에 속하는 「겨울 이야기」로 1992년 베를린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가을 이야기」로 1998년 베니스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세기 한적하거나 붐비는 어느 해변, 계절의 풍광이 온몸으로 흡수되는 한때, 머릿속과 마음속을 휘젓는 감정들의 파동을 하나의 격언으로, 한 권의 책으로 읽는 독서의 사치와 평온은 특별하다. 100분을 상회하는 장편영화로 발전할 수 있을 정도의 한 문장을 써낸, 인생의 본질을 과감하게 축약해낸 통찰가들의 이름에는 시인 랭보도 있고, 우화작가 라퐁텐도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에릭 로메르가 직접 쓴 격언이다. 오늘 하루만 해도 우리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순간이 있던가.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각할 수 있던가. 이 알쏭달쏭한 질문을, 로메르의 영화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알쏭달쏭하게 느끼는 일도 드물다. 『희극과 격언』은 아무렇게나 지나쳤을, 지나치고서도 아쉬움 한 조각 남기지 않았을, 아주 작고 절묘하게 벼려진 반짝이는 칼날을 주워들게 되는 비밀스러운 기쁨을 선사하는 조그마한 책이다. 『희극과 격언』은 명징한 하나의 격언에서 풀려나가는 청춘 저마다의 복잡다단한 사고와 감정의 폭풍에 기꺼이 머리와 몸을 맡겨보는 기꺼운 독서의 모험을 선물할 것이다.
1권에는 「비행사의 아내(1981)」, 「아름다운 결혼(1982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 「해변의 폴린(1983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세 작품이 실려 있다.
✔︎ ‘희극과 격언’ 연작에 대하여
“’희극과 격언’이라는 제목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다. ‘희극’이라는 장르의 규칙에 따르지도 않았고, ‘격언’이라 하기에는 직접 만든 구절이나 문학에서 따온 인용도 더러 있다. 이번 연작이 앞선 연작과 가장 다른 점이라면 이제 소설이 아닌 연극의 주제와 구조를 따른다는 것이다. 앞선 ‘도덕 이야기’ 연작의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이 겪어나가는 일들을 해설하는 반면, 이번 연작의 인물들은 스스로 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즉 앞선 인물들이 자신을 소설의 서술자로 여긴다면, 이번 인물들은 그들의 가치를 내보일 수 있는 상황 속에 놓인 연극의 주인공들이다. 이 연작에 공통 주제라는 것이 혹시라도 있다면, 미리 제시되지 않은 채 작품이 흘러가면서 관객과 감독, 그리고 아마도 인물들 스스로가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
‘희극과 격언’의 인물들은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말들은 특정한 사건의 진실이나 가능성에 질문을 던지려는 것도, 동기를 분석하고 가늠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도덕적 태도보다는 실제적인 규칙을 정의 내보려는 것이니, 목적보다는 방법을 논하는 셈이다. 이로써 우리는 아마도 더 실제에 가까우며, 한층 따뜻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우리와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주인공들은 뭉클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들의 비장미는 대개 우스꽝스러움으로 희석되지만 말이다.” ㅡ에릭 로메르
🌸 「비행사의 아내(1981)」
안: 진실을 알고 싶어? 난 내가 하는 말을 정말로 믿어.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 오늘 아침 크리스티앙이 나에게 자기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러니까 어떤 일이 불가능해지면 갑자기 그걸 욕망하게 되는 법이잖아… 만약 그 사람이 그 말 대신 자기 아내를 떠나서 나와 같이 살겠다는 말을 했다면 거절하기 매우 어려웠겠단 생각이 들었거든… 하지만 그래도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난 누군가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느니 혼자서 불행히 사는 편을 택하겠어.
실비: 넌 완전히 비현실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거야. 너랑 같이 살지도 않는 남자를 어떻게 계속 붙잡아두겠다는 거야? 난 이해가 안 돼. 차라리 그런 남자들은 이해가 가. 내 앞에선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결국 계속 아내와 살면서 임신까지 시키는 그런 남자들. 난 그런 환멸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에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누구든 만날 수 있는 거, 이 남자 저 남자 돌아가며 만나보는 거 물론 좋지. 나도 한때는 그런 삶을 즐겼어. 하지만 그런 모든 일들이 지겨워지는 나이가 있는 거라고. ㅡ본문에서
우체국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청년 프랑수아는 연상의 연인 안이 전 애인 크리스티앙과 헤어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안은 크리스티앙과 비로소 헤어졌다고 말하지만, 질투심에 사로잡힌 프랑수아는 얼떨결에 크리스티앙의 뒤를 밟기 시작한다. ‘희극과 격언’ 연작의 첫 작품으로 로메르는 ‘도덕 이야기’의 일인칭 시점을 포기함으로써, 자유롭게 움직이는 시점을 통해 한바탕 뒤섞이는 서사를 만들어낸다. 영화평론가 앤드류 새리스가 “지난 10년간 본 영화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평한 바 있다.
🏖 「아름다운 결혼(1982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
사빈: 난 결혼할 거야.
시몽: 뭐?
사빈: 당신도 결혼했잖아. 나라고 못 할 건 없지.
시몽: 누구랑?
사빈: 아직 몰라. 이제 고를 거야. 내 마음에 드는 남자.
시몽: 그래, 행운을 빌게!
사빈: 고마워. 당신의 결혼이 실패작이라고 해서 나도 그러란 법 없잖아. 난 아주 제대로 고를 거라고. ㅡ본문에서
사빈: 몇 마디 나눈 게 다야! 괜찮은 남자인 건 맞아. 하지만 괜찮은 남자가 한둘이니.
클라리스: 그렇게 많을 것 같진 않은데. 어쨌든 난 알고 넌 모르는 사실을 말해줄게. 네가 에드몽 맘에 들었다는 거야.
사빈: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클라리스: 난 알아!
사빈: 그 사람이 그러든?
클라리스: 들은 건 아니지만 내가 그의 눈빛에서 읽었지. 내가 네 눈빛에서 에드몽을 맘에 들어 한다는 걸 읽었듯이. 심지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걸 직접 본 것 같아. 거의 불꽃이 튀는 느낌이었다니까. ㅡ본문에서
‘희극과 격언’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주인공 사빈은 결혼하기로 무작정 결심하지만, 누구와 언제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 사빈을 연기한 베아트리스 로망이 16년 뒤에 나이 든 독신 여성을 분한 로메르의 장편영화 「가을 이야기」와 견주어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 「해변의 폴린(1983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피에르: 온전히 너 자신으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란 말이야. 네 소명을 다하면서.
마리옹: 내 소명이 뭔데?
피에르: 네 직업, 네 일 말이야. 그건 남태평양이 아니라 파리에 있잖아. 넌 제 토양에서만 활짝 피어날 수 있는 꽃이라고.
마리옹: 피에르, 너 이러다 조만간 내가 프랑스를 배신했다고 몰아세우겠다! 정말이야. 네 질투심에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ㅡ본문에서
(폴린은 흐느끼기 시작한다. 피에르가 폴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려고 하지만, 폴린은 그를 밀어내며 마리옹에게 매달린다.)
피에르: 미안해, 폴린. 너에게 상처 줄 마음 없었어. 하지만 네가 무시당하는 건 못 참아. 너도 진실을 알 만큼 컸잖아.
(앙리가 계단을 내려온다. 그는 피에르에게 경멸하는 눈빛을 던지고는 마리옹 곁으로 온다.)
앙리: 마리옹에게 그 얘길 꼭 할 필욘 없었잖아. 게다가 입이 가벼운 사람에게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