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페로, 그림형제, 그리고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빨간 모자의 변신
빨간 모자는 누구에게나 참 익숙한 이야기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늑대를 만나 벌어지는 이 이야기를 처음 글로 기록한 사람은 샤를 페로였다. 샤를 페로의 빨간 모자는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늑대가 빨간 모자를 잡아먹는 것으로 끝난다. 페로가 빨간 모자를 기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뒤, 그림 형제 또한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림 형제의 빨간 모자는 결말을 바꾸어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와 빨간 두건을 구하는 착한 결말에 이른다.
기록되기 이전부터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지다 1697년 처음 기록된 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또 다시 빨간 모자가 우리 곁에 찾아왔다. 샤를 페로는 이야기 끝에 정중한 행동을 하는 늑대가 사실은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는 교훈을 남겼고, 그림형제는 빨간 모자의 마음에 십분 대입한 결말을 내놓았다면,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듣고 읽어 이제는 닳고 닳았을 법한 이 이야기로 저자인 필립 잘베르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필립 잘베르가 주목한 것은 ‘두려움’이다. 그는 유아기, 혹은 성인이 되어서도 느끼는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장 익숙한 이야기를 통해 재현해 냈다. 분명 결말까지 알고 있고, 충분히 듣고 읽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너의 눈 속에>는 독자로 하여금 신선하다 못해 당혹스럽게 두려움에 직면하게 함과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놀라운 힘을 가진 그림책이다.
빨간 모자와 늑대의 시선 교차 방식이 엮어 낸 쫀쫀한 긴장감의 세계
<너의 눈 속에>의 표지는 제법 강렬하다. 상단과 하단에 깊이 박힌 눈동자 두 개가 독자들의 마음까지 서늘하게 꿰뚫어 보는 듯하고, 이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이 들게 한다.
첫 장부터 심상치가 않다. 왼쪽 장면은 암흑, 오른쪽 장면은 길을 떠난 빨간 모자에게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을 몇 장 넘겨 보면 왼쪽에는 멀리 보이는 빨간 모자의 뒷모습, 오른쪽에는 숲 속에서 일하는 나무꾼들의 모습이다. 여기에 글은 “어, 엄마가 이야기한 아저씨들이네. 안녕하세요?”. 빨간 모자의 목소리다. 그렇다, 왼쪽은 캄캄한 굴에 틀어박혀 있다 숲으로 어슬렁거리며 나와 빨간 모자를 쫓는 늑대의 시선이고, 오른쪽은 숲 속 할머니 댁에 가는 빨간 모자의 시선이다. <너의 눈 속에>의 모든 장면은 이 두 인물의 눈에 비친 풍경들이다. 글 또한 왼쪽은 서슬 퍼런 늑대의 말로, 오른쪽은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 마냥 즐거운 소녀의 노랫소리 같은 대화글로 이루어져 이미지의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자, 이제 마침내 빨간 모자와 늑대가 딱 마주친 순간, 왼쪽 늑대 영역에는 빨간 모자의 얼굴이, 오른쪽 빨간 모자 영역에는 빨간 눈알을 번뜩이는 늑대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그 순간,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너의 눈 속에>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지루할 틈 없이 마성의 두려움과 긴장감에 빠뜨리는 그림책이다.
검정 선과 붉은 포인트 색, 미색의 여백이 자아내는 침묵의 마력
<너의 눈 속에>는 늑대와 빨간 모자의 입장에서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그림책이다. 어느 순간 늑대가 되어 빨간 모자를 뒤쫓고, 또 어느 순간엔 빨간 모자가 되어 할머니 집의 문을 두드려 보며, 등장인물과 함께 그 길을 걷고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느낌이 들도록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 내기도 한다.
이미지는 오직 검정 선으로만 묘사되었지만 허술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기억의 한 부분처럼, 망원경으로 투사해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빨간 모자의 옷과 늑대의 눈동자에만 선택적으로 쓰인 빨강은 빨간 모자를 향한 늑대의 욕망과 늑대를 향한 빨간 모자의 두려움을 한층 가중시키며 독자를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