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학계로부터 ‘대파문’을 당한 라캉이
정신분석을 통해 과학, 주체, 확실성 등 인문과학의 핵심개념을 새롭게 정초하다.
자크 라캉의 핵심 저서인 총 27권의 '세미나' 중에서 최초로 번역된 저작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의 대표적 세미나 중 하나인 ‘세미나 11권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이 맹정현·이수련 번역으로 새물결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세미나 11권’은 한국어로 번역된 라캉의 첫번째 세미나이자, 한국에서 처음으로 완역된 라캉의 저작이기도 하다.
자크 라캉은 1950년대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된 프랑스 현대 사상의 르네상스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그리고 그 이후 담론들에 핵심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히지만, 그 자신은 어떠한 사상적 조류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 이론을 만들어낸 분석가?이론가이다. 평생 ‘프로이트주의자’를 자임했지만 단순히 프로이트 학설들을 연구·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 고유의 이론을 정립해, 정신분석의 토대를 재확립하고 더 나아가 그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신분석, 철학, 자연과학 등 수많은 영역을 넘나들면서 현란하게 펼쳐진 ‘세미나‘들은 ’에크리‘와 함께 라캉의 대표적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라캉 정신분석에서 자양분을 얻은 이론들, 그를 직접적 대상으로 삼은 연구들이 수없이 소개되었고, 정신분석뿐 아니라 문학 이론, 철학, 페미니즘,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그를 수용·언급했지만 정작 그의 ‘세미나’를 한국에서 접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라캉을 사유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라캉을 접했을 뿐 ‘라캉의 사유’를 직접 대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이 책의 발간으로 여태껏 소문으로만 전해져온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라캉의 텍스트는 ‘읽히지 않기 위해 쓴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지극히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라캉의 텍스트를 한국어로 ‘읽힐 수 있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프랑스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있는 옮긴이들의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 번역 작업에서의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캉 세미나의 편자이자 그의 유고 상속자이기도 한 자크알랭 밀레와의 협의하에 진행된 번역 작업에서는 원문을 오류 없이 옮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명료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하는 언설 스타일, 타 언어권에서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언어유희 속에 담겨 있는 풍부한 의미를 한국어로 담아내고자 했으며, 또 아직 확립되지 않은 용어들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용어 번역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여러 가지 번역어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단어들을 저울질해 가장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려 노력했고, 기존에 소개된 번역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경우에는 새로운 번역어를 선정해 제시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새물결 출판사는 이 책의 옮긴이들과 함께 ‘세미나 1권’을 포함해 라캉의 세미나(총 27권)들을 계속 발간할 예정이다.
‘대파문’, 그리고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는 라캉
라캉의 세미나는 1953년 시작되어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행해졌으며, 매 해의 세미나를 제자이자 사위인 자크알랭 밀레가 편집해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출간되어야 할 권수는 27권이고 프랑스에서도 아직 모든 세미나가 출간되지 않고 계속 발간 중이다. 그렇다면 총 27권의 라캉 세미나들 중에서 ‘세미나 11권‘이 최초로 번역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1973년에 발간된 ’세미나 11권’은 프랑스에서도 라캉의 세미나 가운데 최초로 출간된 것으로서, 1963~1964년에 행한 열한번째 ‘구술’ 세미나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이 시기는 라캉에게 ‘위기’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도약’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53년에 입장 차이로 파리정신분석학회(SPP)를 떠나 동료들과 프랑스정신분석학회(SFP)를 설립한 라캉은 그 뒤로도 기존 정신분석의 ‘규칙’들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SPP 및 국제정신분석학회(IPA)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63년에 IPA에서 축출당한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을 상황이 벌어지는데, 루이 알튀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페르낭 브로델 등의 도움으로 고등사범학교(ENS)에서 세미나를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라캉의 세미나가 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가들을 상대로 했다면, ENS에 새로운 ‘기지’를 구축한 이 시기부터의 세미나에는 당대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장차 프랑스 사상계를 주도하게 될 젊은 철학도들 ― 이후 라캉의 사위가 되는 인물이자 ‘세미나’ 시리즈의 편집자이며 라캉의 저술 저작권을 모두 소유한 자크알랭 밀레도 이 세미나에서 라캉을 처음 만났다 ― 도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ENS에서 실시한 첫 세미나가 바로 그의 열한번째 세미나이며, 그 텍스트가 그의 세미나 가운데 최초로 문자로 확정되어 출간된 것이다. 말하자면 ‘세미나 11권’은 라캉의 정신분석이 프랑스 정신분석학계뿐 아니라 프랑스 사상계 전반에 걸쳐 본격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에 위치한 세미나이다.
라캉은 ‘세미나 11권’에서 IPA가 자신을 축출한 것을 ‘대파문’이라고 표현한다. 정신분석학계 내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라캉은 이러한 대파문을 정신분석의 한계로 인식하고, 정신분석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신분석은 종교와 어떻게 다른가? 정신분석은 과학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과학이 될 수 있다면, 기존의 과학과 어떻게 다른가? 라캉이 열한번째 세미나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은, IPA로 대표되는 전통 정신분석이 점점 더 종교의례에 가까워지고, 또 아무런 성찰 없이 과학을 가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세미나 11권’은 기존 정신분석의 한계를 돌파하고 새로운 정신분석의 토대를 정립하려는 목적을 지닌 기념비적 저작이다.
다른 한편 ‘세미나 11권’은 1950년대의 라캉과 일종의 ‘단절’을 시도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외치면서 언어, 주체, 기표, 상징적인 것 등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상징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들을 구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1950년대만 해도 라캉은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면서 구조주의와 언어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세미나 11권’에서 라캉은 ‘구조의 완결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더욱더 많은 노력을 할애하게 되고, 그러면서 ‘실재’와 ‘대상 a’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미나 11권’은 라캉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의식을 개념화하고, 상징적인 것 너머의 것을 이론적으로 구성하고자 한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세미나 11권’에 소개
1 프로이트를 넘어 진정한 라캉이 태어나는 계기
새로운 정신분석의 토대를 정립하는 것은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진정한 라캉이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전에 라캉이 전념했던 작업은, 프로이트의 정신을 망각하면서 정신분석을 사회 적응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미국식 ‘자아심리학’을 비판하기 위해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이었다. ‘세미나 11권’에 이르러 라캉은 보다 급진적인 계획을 세운다. 이제 그는 기존 정신분석의 이러한 퇴행성이 프로이트 자신 안에 정신분석의 원죄로서 잠재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진정한 정신분석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넘어 정신분석의 토대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미나 11권’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욕망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프로이트를 넘어선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의 암초’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귀착했다고 보면서 그러한 암초를 넘어 정신분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실재’와 ‘대상 a’ 개념이다. 전년도 세미나인 ‘세미나 10권-불안’에서 이미 대상 a를 도출한 바 있는 라캉은 이제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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