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신화 해석에 반기를 든 파격적인 그리스 신화 독법
그리스 신화에서 주체인 자기는 신과 영웅들이고 객체인 타자는 괴물들이다. 주체인 자기는 지배자이고 남성이고 서양이고, 객체인 타자는 피지배자이고 여성이고 비서양이다. 즉 주체는 그리스, 타자는 비그리스다. 그 후 2천 년 이상 그리스를 정신적 지주로 삼은 서양은 비서양에 대해 대립과 정복, 경쟁과 폭력, 차별과 지배를 감행하는 역사의 주체로 나아갔다. 또한 그 괴물은 피지배자이자 여성으로서 계급차별, 성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피지배자나 여성도 괴물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거나 음탕한 존재로 상정되어야 했다.… 타자에 대한 이러한 경멸과 차별 위에 선 주체의 지배, 억압, 배제, 착취, 파멸을 합리화한 것이 그리스 신화의 본질이고, 그것에서 비롯된 서양문화의 본질이다.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은 저자 박홍규의 거꾸로 뒤집어본 신화론이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 법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이전부터 법학 이외의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빈센트 반 고흐, 윌리엄 모리스, 베토벤, 루쉰 등의 평전을 통해 위대한 인간들의 풍성한 인간상을 드러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문화와 제국주의』,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와 같은 문제작을 번역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지나치게 폭넓다 싶지만, 그의 작업들은 억압적인 서구중심성의 폭로와 해체, 그리고 그 너머를 제시한다. 그러한 그가 우리가 넋 놓고 읽었던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스 신화는 한참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추천되는 고전 중의 고전이며, 서양의 문화, 예술, 지명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 요소로 인식되어왔으며, 한참 신화의 붐이 열광적으로 일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서양의 여러 것뿐만 아니라, 중요한 교양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생각되는데다 한국사회의 폭발적인 교육열까지 가세해 어린아이들에게 읽히는 만화로 된 그리스 신화가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중요시되고 널리 읽히는 그리스 신화가 여러모로 유해하다는 문제제기를 한다. 먼저 그리스 신화의 비윤리적 행태와 서구중심적 사유의 확산을 지적하는데, 결국 우리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서구적 방식으로 사유하게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그가 번역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제기하는 바와 크게 맞닿아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수단이자 식민지 지배를 낳고 정당화하는 근원적 힘이다. 결국 인류의 유산이라는 미명 아래 읽히고 회자되는 그리스 신화가 오리엔탈리즘의 원조격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신화와 관련된 책에 비해서 여러모로 파격적이다. 그리스 신화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부정하는 측면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를 바라보는 획일한 시선을 넘어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여 다른 신화 관련서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리스 신화가 지닌 이방을 타자화하는 서구중심적 사유가 어떻게 지금까지 지속되는가를 조명하기 때문에 서구중심적 사유의 오리엔탈리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속성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좁게는 신화를 비판적으로 읽게 하고, 보다 넓게는 현대세계의 평화적 질서를 흔드는 서구의 폭력성의 근간을 엿보게 해준다.
그리스 신화, 왜 위험한가?
그리스 신화가 원초적 본능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라고 예찬하거나, 그것이 서양문화의 원류이기 때문에 서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사실은 그 신화가 음란이나 강간의 폭력주의만이 아니라 전제주의, 전체주의, 제국주의, 팽창주의, 침략주의, 귀족주의, 영웅주의, 군사주의, 물질주의, 권위주의, 속물주의, 성차별주의, 남성주의, 기계주의, 제도주의 따위를 상징한다. 「그리스 신화, 왜 문제인가?」 중에서
박홍규는 그리스 신화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위만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우위와 함께, 외국에 대한 그리스의 우위를 내용으로 하기에 다분히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신화의 내용들은 침략과 지배, 전쟁과 정복, 약탈과 해적행위를 시적으로 미화했으며, 기본적으로 반민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정서를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괴물들은 주체로 등장하지 않고, 언제나 신이나 영웅의 토벌 대상으로 등장한다. 신이나 영웅은 항상 얼짱·몸짱에 선과 미를 대변하지만 괴물은 악과 추를 대변하는 괴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무서워한 외부세계의 자연과 외적과 미지의 세상, 그리고 내부세계의 적인 이단자와 여성을 포함한 피지배자들을 괴물로 표상하였다.
괴물과 대비되어 신화 속 영웅의 비중은 무척 큰데, 영웅은 반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어 타자화된 괴물을 무찌르는 존재다. 영웅은 신은 아니지만, 초인적 존재로 괴물들을 무찌르면서 높이 찬양되는데, 그 활동무대는 주로 외국이다. 저자는 외국의 괴물을 주로 무찌르는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영웅의 모습은 다분히 제국주의적 이미지와 맞닿아 있으며, 그 폭압성과 무법성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그리스 신화 곳곳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여러 형태의 타자화는 기독교 문화를 비롯하여 서구사회의 억압성과 폭력성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현대까지 확대 재생산된다.
이 책은 신, 영웅, 괴물의 삼층 차별구조에 따라 그리스 신화를 분석하였다. 아울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과 더불어 나타나는 동양에 대한 편견과 폄훼의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은 이미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나타났다는 점을 누누이 밝히고자 했다. 신자유주의나 세계화라고 하는 현대세계의 경쟁과 폭력이 아닌, 화합과 평화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 민족과 계급과 성별 간의 투쟁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스 신화 혹은 그리스 귀신이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저자가 제기하는 이러한 추방은 단순히 그리스 신화를 안 읽거나 비판적으로 보자는 것을 넘어서서 폭력성과 억압성으로 점철된 서구중심적 사유를 넘어서는 전망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