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
매혹의 기억이 만들어낸 것이 시라면
민들레의 가녀린 대롱에
풀들이 놀라고 —
겨울은 바로 무한의 탄식이 된다
대롱은 꽃눈의 신호를 들어올리니
그 다음에는 꽃의 함성 —
태양이 선포하니
이제, 그만 묻혀 있으라 —
매혹된 아름다움을 느낀 경험의 기억이 시가 된다.
매혹의 기억은 다시 아름다움이 되어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 시집에 대한 당신의 기억은 또 어떨까?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시리즈 네 번째 번역시집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선정하고 번역하여 출판하는 <파시클>에서 2020년 9월 3일 출판한 시집으로, 매혹 혹은 끌림, 아름다움을 쫓는 시선을 따라서 여름을 기다리는 계절에서 시작해 가을, 겨울로, 다시 봄이 되어 민들레를 기다리며 끝맺는, 8장으로 묶어 배열한 총 56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마녀의 마법에는 계보가 없다』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에 이어 네 번째이다.
<파시클>에서 내놓는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은 시인의 단어 선택, 시행 구분, 연 구조를 가급적 그대로 반영하여 원문 텍스트를 구성, 그를 바탕으로 번역하며 디킨슨의 필사 원고를 텍스트로 번역하였기에, 20세기에 출간된 디킨슨 전집들에 기반한 기존 번역들과는 시의 구성과 내용이 다소 달라 이전에 볼 수 없던 신선하면서도 고전적인 디킨슨의 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작품 하나하나 에밀리 디킨슨의 원문을 가능한 한 생생히 살리려는 번역자의 애정 어린 시선과 손길이 담겨 있다.
자연의 끌림
그대를 위해 나의 꽃을 키우고 있다 —
눈부시게 부재한 이여!
내 푸크시아의 산호색 봉재선이
튿어질 때 — 씨 뿌리는 이는 꿈꾸고 있다 —
디킨슨이 살았던 19세기 시인과 신학자, 철학자들에게 자연은 신학적, 철학적 사유와 창작을 위한 주된 소재이며 주제였던 것처럼 에밀리 디킨슨도 자연에 관한 시를 아주 많이 썼다. 시인의 집 정원과 과수원, 산책로와 저택 앞 가로수, 울타리 너머 초원과 숲, 언덕과 계곡에 핀 꽃과 나무, 새, 벌, 발밑을 지나는 벌레, 농장의 닭과 가축 등 시인의 일상을 함께 했던 모두가 시의 소재이고 주제였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신이 쓴 시와 직접 키운 꽃을 편지에 넣어 보내곤 하던 시인은 친구 엘리자베스 홀랜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원에 핀 꽃들을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고 했다. 디킨슨에게 자연은 늘 가까이 있으면서도, 문득 낯선 존재다. 때로는 철학자나 종교적 교리가 말한 자연관이 겹치기도 하지만 시는 익숙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찰과 경험으로 익숙하고 가까이 있는 존재들의 낯섦과 특별함에 끌린 순간을 시에 옮겼다. 시가 수수께끼가 된 순간이다.
“이제, 그만 묻혀 있으라”
그녀의 상태는 서리 —
티리언이 올 때쯤이면
북에서 그에게 빌겠지 —
창조자여 — 내가 — 꽃을 피워도 되겠습니까?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는 앞서 출판된 시집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마녀의 마법에는 계보가 없다』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에 이어 여전히 아름답고도 독창적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자연을 거울삼아 보편적인 기준과 다른 자신을 통찰하는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두 시집이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노래한다면, 여성주의의 시각이 특히 돋보이는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는 초지일관 자연에서 발견한 매혹, 끌림을 말하니 쉽게 읽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줄곧 읽어온 독자라면, 아니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역시, 시들을 한 편씩 읽어가다가, 작은 대상을 보는 시선이 이토록 솔직하고 수수한데도 어떤 이유로 이토록 가슴을 내내 크게 울리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온통 지뢰밭처럼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마음을 흔들며 터지는 시어의 폭죽.
민들레에게 “이제 그만 묻혀 있으라” 하는 봄날 태양의 선포란, 제가 이제 꽃을 피워도 되겠냐, 하는 질문에 대한 자연의 응답이고, 벽에 기대어져 어느 날이고 쓰일 날을 기다리는 “장전된 총”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중)의 소망이 아닌가.
보석과 같은 언어, 디킨슨이 제출한 수수께끼들
펼쳐놓은 찔레와 이파리 같은
그런 매복은 결코 없으니 —
백작의 수려한 얼굴보다는
차라리 그녀의 우아함을 입으리라 —
엑스터 공작보다는
차라리 그녀처럼 살리라 —(61쪽)
하려고만 들면 — 넘을 수도 있다 —
딸기는 좋으니까!
하지만 — 앞치마를 더럽히기라도 하면 —
신께서 분명 꾸짖으시겠지!
오, 친구야 — 그가 사내아이라고 상상해봤어 —
그도 — 할 수만 있다면 — 담을 넘었을 거야! (63쪽)
내가 자포자기했던 그날 —
이날을 — 만일 내가 잊는다면
당연히 — 밤일 텐데
해 저물어 —
어둠이 언덕을 차지하고 —
하늘을 차지한다. 그리고 눈을 흘기며 —
추억과 내 앞에서 —
자연은 주저하리라 — (87쪽)
정오에는 나비 두 마리 나타나 —
왈츠를 추며 농장 위를 맴돌더니 —
곧장 걸음을 옮겨 창공을 헤치다
어느 대들보 위에 깃들었다 —(115쪽)
저렇게 작은 꽃을 성가시게 하면 안 된다 —
다만 그것이 조용히
우리가 잃어버린 작은 정원을
다시 이 잔디밭으로 데려올 때는 예외다 —(137쪽)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평범한 것을 보고 말하지만 익숙하여 잘 안다고 여기는 것에서 낯선 면모를 발견하여 언제나 평범하지 않게, 늘상 시에서들 사용하는 어휘 말고 뜻밖의 언어를 발굴하여 말한다. 타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늘 작은 수수께끼가 되고 시인과 독자는 문제와 답을 주고받는 잔잔한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 되곤 한다.
익숙한 존재의 낯섦과 특별함에 끌린 순간
나의 나라와 — 다른 이들 사이에 —
바다가 하나 있지만 —
꽃들이 — 우리 사이에서 중재하는 —
직무를 다한다
번역자 박혜란은 아름다움, 이 매혹을 따르는 끌림의 까닭을 이렇게 짐작한다.
“아름다워 뭐하나 싶지만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의미와 가치들이 존재하는 방식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장식적 기교나 금방 사라질 찰나의 광휘나 혹 바스라질까 감히 만지지 못하는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바로크 예술처럼 미확정의 도발과 돌출로 익숙함에 균열을 가져오고 예측을 불허하며 진실을 포착하는 경이의 순간 역시 미학적 대상이기도 하다.”
파시클과 번역
운명은 늙었고
행복에 인색하니
마이다스가 황금을 대하듯 하다 —
<파시클>은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으로 내러티브 이론을 공부하였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 중 에밀리 디킨슨 시를 읽으며 점차 매료되어 페미니즘 시학으로 전공을 바꿔 연구해온 번역문학가 박혜란이 에밀리 디킨슨 시를 번역해 모아 한 권 한 권 시집으로 만들기 위해 설립한 출판사다.
<파시클>은 앞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시리즈로 첫 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마녀의 마법에는 계보가 없다』와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를 비롯해 그림시집 『멜로디의 섬광』 『어떤 비스듬 빛 하나』 『바람의 술꾼』 『장전된 총』을 펴낸 바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