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경복궁을 짓누른 조선총독부 청사, 남산 위의 일본 신사, 중앙정보부 ‘죽음의 방’들…
지워지고 파괴되고 숨겨진, 지금도 사라져 가는 도시의 이야기
「서울의 휴일」(1956), 「자유결혼」(1958) 같은 영화를 보면 배우들의 연기 너머 배경에 흐릿하게 보이는 친숙하고도 낯선 도시 풍경에 눈길이 더 간다. 아득한 고층 빌딩들로 가득 찬 지금 서울의 지면 아래 어딘가 흔적을 내고 남아 있을지 모르는 저 건축물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옮겨 갈지도 모른다.
디자이너 박고은은 20세기 중반 영화 속 낯선 건축물들의 현재 위치를 눈에 익은 지형지물에 근거해 추정해 보곤 했다. 그 일은 마치 지도 위에서 조각난 퍼즐들을 맞춰 보는 놀이 같았다. 한편 이 도시를 구성하는 건축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됨을 깨닫게 되었다. 아파트와 고층 빌딩처럼 현대적인 건축물과 귀하게 보존되고 있는 조선시대 전통 건축물.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많은 근대건축은 고전영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도시에서 사라진 근대라는 시간층을 건축물을 매개로 채워 보고자 한다. “한 시대를 상징했던 건축물은 그 시대가 끝난 뒤에도 살아남아 자기의 삶을 살아간다.”(김현경, 「세운상가의 미래」 중에서)고 했던가. 한 시대를 상징했던 건축물은 물리적으로는 이미 사라졌어도,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라지고 사라질 건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옛 조선총독부 철거냐 보존이냐?’(1991년 MBC 「여론광장」) 논쟁 끝에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철거 행사와 함께 일제 잔재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사라졌다. 그런데 수년간 공론화된 찬반논쟁을 통해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 건축물 같은 부정적 문화유산(Negative heritage)도 철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을 얻었다. 그렇게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생겨 근대 건축물도 보존의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1장 ‘지워진 건축, 일제 식민시대’는 바로 그 조선총독부 청사가 어떻게 우리 근현대사와 함께하다 사라졌는지, 주요 모습들을 시간순으로 따라가 본다. 또한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을 비롯한 일본 신사들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보았다.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일본인이 세워 운영했던 반도호텔의 영락 또한 극적이다.
익숙한 일상의 풍경 혹은 유령처럼 숨어 있는 유산을 찾아서
한국전쟁 중 서울은 남북 간의 치열한 전투와 공습을 겪으며 회복되기 힘든 큰 피해를 입었다. 서울에 생긴 근대건축의 공백은 사실 전쟁의 영향이 컸다. 2장 ‘파괴된 건축, 한국전쟁과 서울 요새화 계획’은 전쟁 중 도심의 파괴, 그리고 전후 서울 요새화 계획으로 급히 건설된 남산터널과 을지로 지하보도, 남산타워, 북악스카이웨이, 잠수교 등을 돌아본다. 이 건축물들은 70년 전 전쟁의 후유증이기도 하다. 방공호(남산터널, 을지로 지하보도)나 전파교란(남산타워) 등의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시설들을 이용하는 시민이 얼마나 있을까. 정전 중이라는 상황은 여전하지만 이들은 어느새 익숙한 일상의 풍경 혹은 유령처럼 이 도시에 있다.
3장은 ‘숨겨진 건축’, 즉 군사정권기 ‘발전국가’를 지향하며 건설된 세운상가를 비롯한 도시 개발,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재조명한다.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 건물들은 이미 많이 사라졌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는 관련 건물 41개 동을 서울시에 이관하며 건물들 모두를 철거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철거를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시대의 어두운 면을 감춘 중앙정보부 건물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저자는 사라진 근현대건축물을 리서치한 결과를 지도 위에 새겨, 함께 찾아보고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이 어두운 역사를 찾을 때 쓸 만한 지도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