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니다: 타인의 고통, 공감한 적 없음.’: 12년 차 PD가 말하는 ‘리얼’이라는 그늘
가히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다. 보통 대본이 없고 일반인이 주인공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제작자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효율성이 높기 때문에 오랫동안 선호되었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각종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사랑받았으며, 최근에는 거의 모든 채널에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을 방송하는 중이다. ‘가성비’가 좋고 또 성공 경험이 축적된 프로그램들이 집중적으로 양산되는 일종의 ‘쏠림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 동조하지 않고, 누가 더 ‘리얼’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리얼’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방송사 PD가 있다. 바로 지상파 방송사에서 12년째 일하고 있는 오학준 PD이다. 그는 자신의 첫 책 『오학준의 주변: 끊임없이 멀어지며 가라앉기』(이하 『오학준의 주변』)에서, ‘리얼’의 그늘, 정확히는 ‘리얼’이라는 그늘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촘촘하게 연출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가장 자연스럽다. 손을 많이 타야, 사람들이 어색해하지 않는다. 만반의 준비를 해도 일반인들이 첫날부터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제작자는 시청자가 원하는 ‘리얼함’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발 빠르게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야 한다.”
최근 많은 화제를 만들고 있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인상적이다. “참여자 가운데 연애하려 애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열 명 남짓한 프로그램 출연자 가운데 다만 한둘이라도 연애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프로그램은 역동성을 상실할 것이다.” 같은 구절에서는 MT 온 듯한 출연자들을 퇴소시키는 장면이 떠오르고, “출연자를 선발하는 단계에서부터 현실은 리얼리티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끝없이 사건을 필요로 한다. 연못에 풀어놓은 ‘메기’처럼 타인을 향해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가 필요하다.”라는 구절에서는 기수마다 이른바 ‘빌런’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가 있는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오 PD는 방송사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다양한 일을 경험한 ‘교양국 아웃사이더’이다. 정규 프로그램과 신규 프로그램에서 쓴맛과 단맛을 모두 보고, 편성 부서를 거쳐, 지금은 디지털 콘텐츠 제작 부서에 있다. 모종의 이유로 ‘오랜 무능’을 결심하기도 하는 자칭 ‘실패한 PD’이지만, 한곳에서 10여 년간 단단히 뿌리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시장이 ‘유연’한 상황에서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인기 프로그램을 연출한 적은 없지만, 다큐멘터리 팀에서 권력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 보기도 하고, 구직자와 구인자라는 견고한 자리를 바꿔 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또 ‘군대’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미키 마우스 티를 입고 라오스 댐 붕괴 사고를 취재하기도 했으며, ‘장승’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우리 곁에 있는 비극을 찍고 내보내지 않기도 했다. 시종 그가 견지하고 있는 일관된 태도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서 고통 구경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족시키지 않기, 고통을 구경하는 작품을 생산하지 않기가 아니었을까.
다양한 경험뿐 아니라 풍성한 레퍼런스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 때의 소동극을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와 솜씨 좋게 디졸브 시키기도 하고, 편성 부서에서 일하게 된 사연을 말할 때는 드라마 〈채널 고정!〉의 한 장면을 인서트 시키기도 한다. 그 밖에도 많은 참고 문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박람강기를 뽐낸다.
『오학준의 주변』은 출판공동체 편않이 소개하는 언론·출판인 에세이 시리즈 〈우리의 자리〉의 여섯 번째 책이다. 〈우리의 자리〉는 언론·출판 종사자가 각각 자신의 철학이나 경험, 지식, 제언 등을 이야기해 보자는 기획이다. 언제부턴가 ‘기레기’라는 오명이 자연스러워진 언론인들, 늘 불황이라면서도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는 출판인들 스스로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저널리즘과 출판정신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 보자는 취지로, 2022년부터 만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