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선사하는
눈부셨던 청춘, 설레던 첫사랑의 기억
지브리 스튜디오 인기 애니메이션의 원작 소설
지하철을 기다리던 타쿠가 우연히 마주친 리카코를 찾아 기치조지역 승강장 계단을 숨 가쁘게 오르던 장면을 기억하는지. 이들의 극적인 재회로 막을 내린 지브리 스튜디오 시리즈 원작 소설, <바다가 들린다>가 새롭게 출간되었다.
게다가 TV 애니메이션 제작 당시 일본 고치 현 출신의 성우가 사투리를 맡아 지도하고 더빙을 했듯, 단행본에도 주인공 타쿠의 조금 무뚝뚝하지만 정이 넘치는 성격과 학교 친구들의 푸근한 이미지를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착착 감기는 사투리의 맛을 살려 편집했다.
풋풋한 느낌을 살린 지브리 스튜디오 작화 감독 곤도 가츠야의 일러스트는 애니메이션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더욱 반가울 것이다.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히무로 사에코의 섬세한 감성과 깔끔한 문체 역시 스토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연애소설 하면 흔히 떠오르는 갈등과 재회의 무한 반복 대신, 화자이자 주인공인 모리사키 타쿠를 중심으로 한 짜임새 있는 구성은 <바다가 들린다>가 인기 소설과 애니메이션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시코쿠의 지방 도시 고치를 떠나 도쿄의 사립대학에 다니게 된 타쿠는 친구를 통해 리카코의 소식을 듣는다. 때문에 리카코를 처음 만난 고2 여름방학, 처음 대화를 나눈 하와이의 수학여행, 뜻하지 않게 단 둘이 떠난 도쿄행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조금 특별하고, 씁쓸하기도 했던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는 타쿠.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장소에서 리카코와 마주치는데……
바다에서 시작된 사랑과 우정
타쿠와 리카코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수학여행지에서 처음 마주치던 날부터 2년 뒤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서 재회할 때까지도 영악한 리카코에게 번번이 이용당하기만 하는 타쿠. 막무가내로 자기중심적인 리카코와 달리 우직한 바른생활 사나이인 타쿠. 둘은 마주칠 때마다 심심치 않게 오해와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점차 신뢰를 쌓아간다. 모나고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던 리카코가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순수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심술에 화를 내면서도 자꾸 보듬어주는 타쿠의 모습에서 소년이 아닌 한 남자의 듬직함을 찾게 된다. <바다가 들린다>는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닌, 갓 청년기를 맞은 이들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서툴렀던 청춘의 시간을 지나온 세대의 이야기
순박하고 강직한 타쿠, 차갑고 고집스럽지만 어린 아이같은 면모를 가진 리카코, 평범한 우등생이자 사람좋은 마츠노……. <바다가 들린다>의 등장 인물들은 ‘만화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라, 학창 시절 같은 반에서 한 번쯤은 만났을 법한 캐릭터들이다. 이들이 겪는 고민과 갈등, 저마다의 심정과 기분을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교 졸업 후 동창회에 모인 친구들이 한때의 갈등을 자연스레 화해하는 모습에서 미소 짓게 된다. 그리웠던 바닷소리를 들으며 예기치 않은 데이트를 했던 첫사랑과의 데이트에서 애틋함을 느끼게 된다.
분명히 <바다가 들린다>의 스토리는 시종일관 감동과 눈물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숨가쁜 전개나 급격히 치닫는 절정이 없는 대신,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네 삶에 늘 카타르시스만 있는 건 아님을 진즉에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실제 또래인 이십대 초반보다는 그 시절을 한참 전에 지나온 세대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추억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뒤늦게 깨닫는 사랑의 감정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라고 어떤 이는 말했다. 과연 그럴까? 반드시 내게 첫사랑은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그땐 미처 모른 채 지나고 보니 사랑이었다거나, 사랑의 감정을 지금까지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사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타쿠 역시 리카코에 대한 마음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예민한 시기에 많은 일을 겪은 리카코의 속사정을 알게 된 이후, 그녀를 가엾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타쿠는 어쩌면 둘 사이의 새로운 전개를 맞게 될 도쿄로의 진학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둘은 여느 소설의 남녀처럼 뜨겁고 절절한 사랑을 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좋아한다는 말조차 한 번도 꺼내지 못했지만 리카코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나온 시간을 떠올릴 수 있었던 타쿠. 리카코와 함께했던 학창 시절, 그때 그의 마음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한때 두근거림이었을까?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는 특별한 시간
청춘의 이야기는 늘 진한 여운을 남긴다. <바다가 들린다>를 단순한 러브스토리로만 접해온 독자들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쉬움을 달랠 수도,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어설펐던 젊은 날에 대리만족을 할 수도 있다. 추억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오늘’이라는 시간의 값어치를 깨닫도록 다독여주는 그 시절의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진심을 전하기에 주저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콧잔등에 진땀이 맺히는 수줍은 날들을 후회할 필요는 없음을 알게 된다.
누구나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시간, 청춘. 그 여름날의 뜨겁고 순수한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