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재키 울슐라거
7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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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유대인, 러시아, 그리고 벨라 1부 러시아 1장 / "내 슬프고도 즐거운 마을" 비테프스크, 1887-1900년 2장 / 펜의 화실에서 비테프스크, 1900-1907년 3장 / 금지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1907-1908년 4장 / 첫 번째 여자 친구 비테프스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1908-1909년 5장 / 벨라 비테프스크, 1909년 6장 / 레온 박스트 상트페테르부르크, 1909-1911년 7장 / "초자연적이군!" 파리, 1911-1912년 8장 / 블레즈 상드라르 파리, 1912-1913년 9장 / "나의 잔인한 천재" 파리, 1913-1914년 10장 / 귀향 비테프스크, 1914-1915년 11장 / 결혼 페트로그라드, 1915-1917년 12장 / 인민위원 샤갈과 공산당원 말레비치 비테프스크, 1917-1920년 13장 / 샤갈의 특별석 모스크바, 1920-1922년 2부 망명 14장 / 슈투름 베를린, 1922-1923년 15장 / 고골의 "죽은 넋" 파리, 1923-1924년 16장 / "빛과 자유" 파리, 1924-1927년 17장 / 예언자들 파리, 1928-1933년 18장 / 방랑하는 유대인 파리, 1934-1937년 19장 / 백색의 십자가 파리와 고르드, 1937-1941년 20장 / 미국 뉴욕, 1941-1944년 21장 / 버지니아 뉴욕과 하이폴스, 1944-1948년 22장 / 유럽으로 돌아가다 오르주발과 베네치아, 1948-1952년 23장 / 바바 방스, 1952-1960년 24장 / 큰 벽의 시대 방스와 생폴, 1960-1970년 25장 / "나는 괜찮은 화가였소." 생폴, 1971-1985년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사랑과 외로움, 배신과 망명으로 점철된 위대한 예술가이자 위대한 생존자의 초상 1887년 러시아 변방에서도 유대인 빈민촌에서 태어난 샤갈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가족과 이웃에게는 ‘화가’라는 단어조차 낯선 개념이었다. 샤갈이 동네에서 유일한 미술 학원이었던 유리 펜의 화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족이 ‘화가’라는 것이 ‘사진사’처럼 일종의 밥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의 나중은 창대해져서,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사의 거장이 되었고,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아서 생존 예술가로서 가장 큰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샤갈의 인생 여정은 시기와 경쟁, 가난과 외로움, 학살과 망명, 그리고 가족의 비극으로 점철된 참혹한 20세기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샤갈이 예술적 경쟁자들뿐 아니라 자신을 이용한 화상, 정적, 착취자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오로지 끝까지 살아남는 길뿐이었다. 재키 울슐라거의 『샤갈』은 격정의 세월을 살다 간 샤갈의 98년 인생에서 내면의 두려움과 예술적 갈등, 그리고 생존의 열망을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내 주고 있으며, 깐깐하기로 유명한 샤갈 재단 측에서 제공한 귀중한 사진 자료를 가장 많이 수록한 책이다. ★ 그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화가 샤갈은 처음부터 기존의 예술과 갈등을 빚었다. 첫 번째 스승 유리 펜의 사실주의 화실을 뛰쳐나와 당시 유럽 예술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철저한 소외 속에서도 상징주의 문학을 흡수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자유로운 감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샤갈은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화가들과 정서적으로 달랐고, 자신이 태어난 곳의 유산으로부터 끌어내어 그림에 경험의 직접성을 부여했다. 화가로서 첫 번째 작품으로 꼽는 「죽은 자」(1908)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강박을 풀어낸” 초기 걸작으로, 사실주의 전통을 배제하면서도 인생의 부조리한 이야기를 담아냈고, 프로이트의 심리학 시대를 예고했다. 샤갈의 첫 번째 도약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진다. 미술세계파의 수장 디아길레프는 제자 샤갈이 프랑스에 따라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지만, 무일푼이면서도 운 좋게 파리 땅을 밟은 샤갈은 당시 혁명적이었던 인상파, 부드러운 색의 앵티미즘에 끌리기도 하고 입체파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온갖 경향들이 피어나고 있는 예술의 중심지에서 샤갈은 그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샤갈은 입체파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정신을 흡수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성을 잃지 않기 위해 긴장, 저항과 타협 속에서 걸작들을 쏟아냈다. 파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비평가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관심을 사로잡은 「약혼녀에게 바침」(1911)은 샤갈을 프랑스 예술계에 “낯선 이국의 침입자”처럼 보이게 했다. 이 시기에 날아다니는 인물, 인격화된 농장의 동물들, 러시아 마을 등이 샤갈의 주요 테마로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은 형태와 색채를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신비로운 힘과 호소력이 부여되었다. 러시아를 몽환적인 환상으로 변형한 「나와 마을」(1912)처럼 프랑스 모더니즘은 샤갈의 소재들에 새로운 표현 기법을 제공했다. 아무리 아방가르드의 첨병 도시 파리라 할지라도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이 20세기를 휩쓸기 전이었던 1910년대에 샤갈의 목 없는 형상, 관능적인 소,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짐승들의 환각적인 세계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술 평론가 야코프 투겐홀트는 프랑스의 모든 그림들은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형식에서 비롯되었지만 샤갈은 무의식적인 본능, 구속받지 않는 풍부한 색채, 샤갈이 모더니즘의 역사에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서양 미술에서의 형식, 즉 의식의 이성주의에 도전하는 표현적이고 신비로운 감성”이었다. 문학을 전공한 미술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샤갈의 예술을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샤갈의 모든 예술적 원천을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으며, 이 책은 샤갈 재단이 유일하게 인정한 가장 권위 있는 샤갈 전기라고 할 수 있다. ★ 러시아, 유대인, 그리고 벨라 샤갈은 여자 친구 테아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녀의 친구 벨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벨라는 나중에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테아는 숨쉬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두 눈 속에서는 불꽃이 너울거렸다. 무슨 일이니? 내가 너에게서 뭘 빼앗은 거니?” 샤갈은 더 이상 테아를 그리지 않았고, 벨라의 영향으로 그녀에게 고전적인 기품을 부여한 「검은 장갑을 낀 약혼녀」(1909)를 그렸다. 샤갈이 벨라를 만날 때는 그녀가 유대 하시디즘의 열정을 새로운 종교, 즉 예술로 갈아치우고 난 때였다. 벨라는 러시아 전체에서 네 명의 최우수 학생 가운데 하나였고, 러시아 여성 가운데 3퍼센트만 들어갈 수 있는 모스크바의 게리에르 여자대학교에 들어간 수재였다. 보수적인 유대인촌에서 이 젊은 커플은 마을에서 하나의 센세이션이었다. 벨라는 샤갈이 혼자 머무는 초가집에 매일 찾아갔고, 테아는 자신이 누드모델을 섰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가 하면 아름다운 벨라를 사모하던 청년은 샤갈에게 가짜 편지를 쓰기도 했고, 부유한 보석상이었던 벨라의 부모는 막내딸을 가난한 청년에게 줄 수 없다며 수선을 피웠다. 샤갈은 벨라와 결혼하는 1915년에 그 유명한 「생일」을 그렸고, 이후 아름다운 연인들 연작을 쏟아 냈다. 샤갈에게 벨라는 단순히 아름다운 뮤즈가 아니었다. 샤갈이 아무리 문화적으로 빈곤한 고향 마을에서 벗어나려고 했어도, 그의 예술의 원천은 러시아 유대인촌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흡수한 러시아 문화이었다. 「산책」에서 샤갈의 손에 쥐고 있는 파랑새(스타니슬라브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연출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 어릴 적 이웃집 아저씨가 가르쳐 준 바이올린 연주(유대인 가족의 애환을 그린 유명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연상시키는 이미지), 어머니의 초라한 가게에 찾아온 늙은 거지(「붉은색의 유대인」과 「기도하는 유대인」 연작의 주인공)와 괘종시계, 의인화된 소와 수탉, 유대인 마을의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인물들 모두 조국 러시아의 유산이다. “모든 화가는 어디선가 태어나지요.” 1940년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샤갈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 다른 환경의 영향들에 반응할지라도, 어떤 본질, 그러니까 출생지의 특정한 ‘향취’는 그의 작품에 들러붙어 있습니다. … 초기의 영향들이 남기는 중요한 흔적은 이를테면 그 화가의 필치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나무들의 특징에서,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반 고흐의 지평선과 구불구불함에서,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의 아라비아적인 장식들 속에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의 15세기 이탈리아의 선적인 느낌에서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태어난 샤갈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망명자로 살면서 가족과도 연락할 수 없고 결코 조국 러시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때, 샤갈이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 준 것은 바로 벨라의 존재였다. 샤갈에게 벨라는 유대인의 러시아가 구체화된 존재였다. “벨라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녀는 구름과 나무와 집들과 더불어 드비나 강에 비친 비테브스크 언덕 위의 다람쥐였다.” 샤갈은 벨라에게 그림이 “맘에 드는지 묻기 전에” 작품을 끝내는 법이 결코 없었다. “벨라는 정말로 나를 ‘느꼈다.’ 그녀는 내 미친 듯한 창조물들의 일부였고, 그 창조물들은 결코 그녀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샤갈과 벨라는 그림을 팔 때도 한 편의 완벽한 커플이었다. 컬렉터가 그림 값을 물으면 표정이 풍부한 샤갈은 천진한 얼굴로 자신은 돈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벨라를 불렀고, 벨라는 클라이언트 뒤에서 손짓하는 샤갈의 신호에 따라 값을 불렀으며, 샤갈의 예술관에 감동한 고객은 돈을 깍지 않았다. 샤갈 곁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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