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처럼 기이한 만남: 라캉과 마오주의에 기반한 반(反)철학의 대표자,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비관과 절망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을 만나다.
포스트모던의 해체 철학은 9.11 테러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를 약속해주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이후의 현실 세계는 지하드라는 성전(聖戰)과 테러와의 전쟁이 전 지구적 규모로 맞붙고,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극한적인 상대주의가 난무하는 디스토피아로 순식간에 변해버리고 말았다. 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를 그치고, 공항에서의 지문 검색과 길거리의 요소요소에 비치된 감시 카메라가 상징하듯 정치는 공포와 감시에 기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러한 현실을 고민해야 하는 철학은 ‘주체의 종말’, ‘대서사의 죽음’ 등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자살해버린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반(反)철학과 비관주의가 횡행하는 우리 시대에 일찍부터 반철학과 함께 새로운 주체, ‘해체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진리는 오직 체계적일 뿐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온 ‘사건’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이 책에서 바울과 만나는 방식은 기발한 만큼이나 이러한 우리 시대에 대한 유비로 가득 차 있다. 로마 제국은 오늘의 미국으로 유비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을 ‘정신’으로 삼키게 되는 기독교(일찍이 헤겔은 이를 두고 세계 역사의 최대 미스터리라고 한 바 있다)는 제국의 변방에서 최초의 신앙을 싹 틔우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대교 공동체에 근거하려는 12제자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철학적 지혜로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리스 세계에 갇힌 철학을 위한 ‘지혜’일 뿐이었다. 이때 기독교도들을 때려잡으려 다니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된다.
바디우는 이러한 식으로 2,000년 전의 인물, 사도 바울을 우리 시대로 소환한다.
되살아오는 사도 바울,
모든 특수주의와 사이비 보편성을 거부하고 진정한 보편성을 위해 싸우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인가? 그것은 이 책 3장에서 소개되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유작 시나리오가 잘 보여주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바울이 우리와 너무도 밀접한 동시대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또한 특수주의 그리고 (법률적 혹은 경제적인) 추상적 보편성과 단절하고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바울은 로마 제국의 법제와 같은 국가적 일반성, 그리스의 철학적.정신적 담론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일반성, 그리고 유대의 율법주의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코뮌주의).특수주의를 모두 단호히 거부하며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28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바울에게(그리고 바디우에게) 진리란 “모두에게 제공되고 말 건네지는” 것이며, “어떤 귀속 조건도 이러한 제공과 말 건넴을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바울을 종교라는 층위에서 읽어내지 않는다. 그에게 바울은 “보편성의 반철학적 이론가”이며 보편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는 행동가이자 투사, 그리고 조직가이다(바디우는 바울을 “모호한 마르크스를 그리스도로 삼은 레닌에 비교”한다). 예컨대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대인,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신앙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를 직접 수행했던) ‘역사적’ 사도들과 의례 문제(그리스도교도가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 등의 유대 의례를 행하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벌였던 갈등은, 바디우가 보기에 바울의 보편주의와 역사적 사도들의 특수주의(유대 공동체주의) 사이에 벌어진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사상과 그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성경 구절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해낸다. 우선 그는 바울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과 부활은 결코 생물학적인 사태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육체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생각은 생명입니다”('로마서', 8장 6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하나의 사유이자 분열된 주체의 두 갈래 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며, ‘죽음을 향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분열적 구성 안으로 진입하는) 죽음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활 역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승리, 이러한 “죽음을 죽여버리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그 승리의 가능성을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죄, 율법,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등의 개념이 정교하게 다시 해석되며, 너무도 유명한 세 단어 ― 믿음, 희망(소망), 사랑 ― 가 확신, 확실성, (보편적 힘으로서의) 사랑 등으로 다시 명명되고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얼굴의 바울, 우리 사회를 향해 말 건네고, (신자건 아니건) 우리 모두를 향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눈물짓고, 위협하고, 용서하고, 공격하며, 부드럽게 포용하는 바울과 만나게 된다. ‘하나의’ 진리(그리고 일신론)에서 ‘하나’란 바로 “예외가 없음”, “모두에 대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을 통해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미명하에 보편적 진리에 대한 탐구는 애초에 포기되고, 자본이라는 추상적 보편성만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시대를 뚫고 헤쳐 나갈 사유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