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여기 한 사상가가 있다. 한쪽에서는 그를 지나친 급진에 물든 공상가로 치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를 과거의 향수에 찌든 보수주의자쯤으로 간주한다. 한쪽에서는 “좌파 지식인들을 겨냥한 지적 폭력”을 가한다며 비난을 쏟아 붓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국적도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인사로 규정하며 쇠사슬과 총격을 비롯한 갖은 박해를 시도한다. 한편, 그는 ‘가디언’, ‘르몽드’ 등 쟁쟁한 잡지에서 선정한 “20세기의 최고 지성”이자, 환경운동가와 아나키스트들, 해방신학 활동가들에게는 일종의 “정신적 멘토”이기도 했다.
열한 개의 언어를 익혔으며 세 개의 학위를 갖고도 평생 “떠돌이 학자”를 고집한 사람, 몬시뇰이라는 명예로운 직책과 대학교 부총장이라는 높은 사회적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빈민과 기거를 같이하여 항상 행동하는 활동가이자 그저 역사학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사람. 그는 언제나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이 전통에 기반을 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그가 내놓은 의견들은 항상 우리 사회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강하게 공격했으며, 해석을 놓고 세간의 갖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각설하고 말하자면, 여기서 소개하려는 사람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사람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 바로 그이다.
우리 속에 자리 잡은 확실성을 공격하는 지치지 않는 사상가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언어학, 의학, 여성학, 종교학, 문학 등 어느 한 분야를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큰 족적을 남겼던 그의 사유의 방법은 그러나 현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명쾌하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 모두 “과거로 돌아가 성찰하자는 것”이다. 명쾌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사유 방식과 마찬가지로 그가 내세우는 주장 역시 그만큼 명료하고 또 소박하다.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corruptio optimi quae est pessima.” 그는 이 한마디를 기준 삼아 우리 사회의 온갖 제도적 모순들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선의로 시작한 많은 일들이 제도화 되면서 선의 그 자체를 체제 속에 가두어 버린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만든 병원이 어느덧 우리를 병원이 관리하는 체제 속에 가두어 구속하며, 선한 의도로 세운 학교가 어느새 우리 사회의 차별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저개발국가에 대한 개발원조 역시 선의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어느덧 그곳 사람들에게 자본 사회에서 소외된 자의 무기력함을 일상화시켜, 소위 “목마름을 콜라가 부족한 상황”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양산해버리고 만다. 좋은 사회 혹은 좋은 국가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가 점차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어느덧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현상은 일일이 예를 들기도 힘들 만큼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몇몇 현상을 제외하면 우리들 자신은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또 지적하지 못하며, 심각한 성찰 역시 그저 피상적 비난에 그치고 만다. 우리들 자신이 이들 “선한 의미의 단어들”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일리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범주, 사상들이 이미 너무나도 깊은 확실성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았기에 그것이 사실 부자연스럽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낱말이다.
인간이라는 범주는 계몽운동 이후 사상 속에 너무나도 깊은 확실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이게 근래에 조작된 사회적 개념이라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중의 게토’ 중에서
현재를 알고 싶다면 과거로 돌아가라, 그리고 들여다보라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해내기 위해 일리치가 택한 방법이 ‘과거로의 여행’이다. 꼭 특정한 과거가 아니더라도 그저 현재와 충분히 떨어져 있어 두 시기의 차이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과거라면 좋다. 일리치는 그 중 자신이 특히 익숙한, 그리고 자신이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12세기의 사회와 저술들로 돌아가 성찰을 시도한다. 그는 12세기의 사람들에게 당시의 말로 현대 사회의 모습들을 설명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그 모습들이 예전과 비교하면 얼마나 달라졌는지, 또 우리가 쓰는 용어들의 의미가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아챌 수 있다. 기관총에 대해, 핵무기에 대해, 개발 원조나 교육, 혹은 의료에 대해 그는 12세기의 사람에게 당시의 말로 설명을 시도한다. 때로는 우리가 쓰는 말을 당시의 언어로 바꾸어 풀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은 종종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의 모순을 깨닫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
“전 지구적 관리”라는 말에 대해 들었을 때, 주로 12세기와 13세기 문서를 읽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 말을 라틴어로 번역해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경우 그 말은 ‘인간에게 딸린 우주’로, ‘인간의 손 안에 놓인 우주’로, 그리고 ‘예전에 인격체라 부르던 것을 인간의 손 안에 내려놓는 행위’로 번역된다. 인간이 세계를 만든다는 관념이 여기서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관념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사상에서 유래하며, 이런 관념이 강력해지면 강력해질수록 책임responsibility이라고 하는 저 이상한 낱말이 더 강해진다. 책임은 법적으로 해명할 의무라는 의미로 오랫동안 사용됐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 의미를 띠지 않는다. 이제는 누군가에 대한 법적 의무가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낱말은 세계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또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사회적 전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 속에는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어떤 지배력이 있다는 암시도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과학적 노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확신함으로써 우리에게는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을 필요를 더 키운다. 생명을 책임질 수 있다는 말에는 생명을 더 낫게 만들고 생명을 되찾고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두 개의 문간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고안하고 인간이 만든 생명이 죽어버린 자연 속에서 부활하는 모습이다. 생명은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
‘사람 손 안의 우주’ 중에서
일리치의 사상과 생애를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지침서
이 책은 이반 일리치가 CBC 라디오 진행자인 데이비드 케일리와 나눈 5년 동안의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학교 없는 사회>, <그림자 노동>, <성장을 멈춰라>,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 현대 사회를 성찰하는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고전과 현대의 숱한 책들을 인용하며, 국적을 넘나들며 사용하는 일리치 특유의 어휘와, 그가 즐겨 사용하는 은유적, 비유적 표현 때문인지 그의 글은 생각만큼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 자신이 자신의 사상을 글이 아닌 “말로 풀어낸” 대담집이다. 5년 동안의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대담은 일리치의 말을 빌리면 만년의 그의 사상의 변화를 “엿보게 하는 열쇠구멍”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그가 해왔던 말과 생애에 대한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의 흐름이 때로는 평범한 일상어를 타고, 때로는 일리치 특유의 묘한 단어들을 타고 말 그대로 독자를 세차게 휩쓸어간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밝혀지는 그의 이력, 그의 생활, 그리고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얘기가 우리를 잔잔한 감동으로 인도한다. 한편, 여러 분야에 관한 많은 책을 남겨왔으면서도, 정작 일리치 자신은 자신의 사상 전체를 하나의 큰 틀로 정리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반 일리치의 전 사상을 골고루 다루며, 그것을 일리치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책은 사실상 이 책이 유일하다. 그가 때로는 힘 있고, 때로는 위트가 넘치게 쏟아낸 5년간의 말들이 대담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