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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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여성들에 대한, 사라지지 않을 기록들 여성의 불안을 전면화하는 여덟 편의 아름답고 강력한 은유 여성의 불안을 매혹적으로 형상화한 ‘고딕-스릴러’ 테마 소설집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가 출간되었다. 강화길, 손보미, 임솔아, 지혜, 천희란, 최영건, 최진영, 허희정, 한국문학을 이끌어가는 젊은 여성 소설가 8인이 2020년을 살아가는 여성이 겪는 불안을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재현한다.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최근 N번방 사건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경유하며 ‘불안’은 여성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주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았다. 불안은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다양한 혐오와 사회적 압박에서 비롯된 것인 동시에, 스스로가 부여하는 제한과 경멸, 혐오 등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불안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의 경험이 겹겹이 중첩되는 곳에 놓이는 공통의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경험이 곧바로 연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삶속에 가로 놓여있는 다양한 차이는 우리를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위치에 놓아두며, 불균질하고 비이성적인 충동 속에 위치시킨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 등, 특정 공간이나 특정 관계에서의 불안을 매개로 인간의 심리를 세밀히 파헤치는 고딕-스릴러 장르는 이런 비뚤어지고 거친 마음의 결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불안을 전면화한다. 뿐만 아니라 그 불안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여러 이슈들과 함께 공명하며 오래도록 여성의 것으로 여겨진 ‘히스테리아’를 해체하고 재조직한다. ‘고딕-스릴러’라는 장르를 통과하여 우리는 ‘기묘하고 표정이 읽히지 않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미쳐 있는’ 등의 이유로 사라져왔던 여성의 서사를 지금 이곳에 가장 문학적인 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만날 여덟 편의 고딕-스릴러 소설이 사회적 약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세계 속의 불안이 정확하게 발화되는 장이 되는 한편, 이 시대에 필요한 공감과 연대를 불러오기를 기대한다. “훨씬 더 많이 분노하고 많은 원한을 느끼게 되기를, 더 이상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되기를 바랐다.” 불안은 직간접적인 죽음의 경험과 연관된다. 여기에 죽음의 곁에 선 여성들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 강화길의 <산책>은 죽음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화자로 삼는다. 마치 영매의 것 같은 그 목소리는 ‘나’와 어머니(‘영소 씨’), 그리고 영소 씨의 친구인 ‘종숙 언니’와 그 언니의 어머니에 이르는 세 세대에 걸친 여성 가족사를 서술한다. 최진영의 <피스> 역시 언니의 자살시도를 눈앞에서 목격한 동생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자매의 어머니인 예언가 오필남 선생은 체중이나 혼전 임신 등을 ‘예언’하며 두 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오필남의 입에서 발화되는 예언은 오랜 시간 동안 여성에게 강요된 사회의 규제를 닮았지만 여성 선배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는 점에서 교묘하게 착취의 구조를 은폐한다. 한편 언니의 자살시도는 화자에게 또 다른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모녀와 자매 사이에 놓인 갈등은 삶과 죽음의 경계만큼이나 봉합하기 어려운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 소설들을 그 불균질하고 까끌거리는 관계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전 세대의 여성에게, 혹은 우리 자신에게 망자의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랬어?” 이 질문은 오랫동안 독자들이 함께 짊어지고 가게 될 질문이기도하다. 고딕의 전통을 따라 중세풍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도 있다. 손보미의 <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는 1930년대에 지어진 2층짜리 고택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 여자가 겪는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편에서는 ‘믿을 수 없는 여성 화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여성의 히스테리를 조명한다. 임솔아의 <단영>은 비구니 효정이 주지로 있는 사찰 ‘하은사’의 기묘한 풍경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다. 효정은 사람들이 여성 주지인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절에 위탁된 여성들 중 일부는 그것을 견디지 못해 절을 떠나간다. 허희정의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역시 P시와 그 외곽에 있는 기묘한 숲을 찾아드는 여성들의 반복되는 실종을 모티프로 하여 세상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조명한다. 그러나 비협조적인 화자로서 그의 여성 주인공은 단순히 희미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음으로써 공포와 긴장을 유예하며 스스로 스릴러가 된다. 이런 소설이 보여주는 주인공의 히스테리는 공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의 근원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이전과 이후의 여자를 소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공간(대저택, 사찰, 숲)의 방식은 거대한 남성중심 사회가 여성의 불안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은유이다. 새로운 공간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에 대한 소설도 있다. 지혜의 <삼각지붕 아래 여자>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매향 이모가 가지고 있던 적산가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래된 가택의 천장에서 들려오는 쿵쿵 소리는 동네의 ‘미친년’ 한자와 주인공의 기묘한 동거를 연상시키며 끊임없는 이야기의 골목을 계속 돌아들게 한다. 천희란의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에서는 고성에 지어진 ‘카밀라 수녀원’이라 호칭되는 가상의 여성공동체에 들어선 모녀가 등장한다. 그러나 한편 완벽해 보이는 이 여성공동체에 대한 모녀의 판단은 엇갈리고 갈등은 봉합되지 않은 채 파국으로 향한다. 유산으로서 두 여성에게 전해진 ‘집’은 생의 터전이기도하지만 불가해한 대상이기도하다. 이 소설들은 여성 서사의 계보 속에 우리에게 상속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유령을 만나기 위해 폐가를 찾아드는 최영건의 역시 스스로의 소유물-몸-에 대한 정체성 불안과 젠더에 대한 내부와 외부의 엇갈린 시건, 그리고 그것을 봉합해나가는 방식에 대한 글로 읽힌다. 누군가 이전에 이곳을 다녀갔다는 지표, 분열과 불안 속의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목소리 여덟 편의 서로 다른 소설들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여성 인물의 불안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른 여성을 겨누고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가 단순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구도로 이해될 수는 없다. 이 불안의 중첩은 ‘반복’과 ‘세대감’을 통해 재현하는 수난사의 일환이며, 사라져왔던 여성들을 적합한 방식으로 구현하고자하는 애씀의 발로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세대의 여성에서 다른 세대의 여성에게 이어지는 언어 속에 은폐된 촘촘한 심리적 착취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쏟아져나오는 여성 서사를 읽는 것은 여성을 수동적으로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공격성을 띄는 실체로서,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존재로서 기록하는 일이 된다. 평론가 강지희는 ‘발문’에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을 빌려 이 여덟 편의 소설을 “극단적인 상태에 대한 소설”이라 칭한다. 소설 속의 비현실적 목소리, 유령, 환각 등은 소설의 끝까지 규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남아서 하나의 지표가 된다. 누군가 이전에 여기 있었다는 신호가 된다. 그것은 미약하게나마 불균형하고 불합리한 방식으로나마 연대의 가능성이 된다. 이 소설집이 지금 이곳에 남기는 궤적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여성의 기록들로 남기를, 그리고 독자들이 아주 적합한 방식으로 이 소설들을 읽어내주기를, 그렇게 연대의 가능성이 시작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