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조조, 유비, 손권, 제갈량 … 난세를 살았던 수많은 영웅의 진면목을 보다! 우리가 흔히 《삼국지三國志》라고 부르는 것은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원래 《삼국지》는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으로, 중국의 위·촉·오 삼국의 정사正史이다. 《삼국지연의》는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소설일 뿐이므로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사 삼국지》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난세亂世’라고 불린 후한 말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시작으로 삼국정립, 후한에서 위魏로의 정권 이양, 촉蜀의 멸망, 위魏에서 진晉으로의 정권 이양, 오吳의 멸망까지를 아우르는 한 시대의 총화總和이며, 그런 까닭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함께 중국 고대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역사서로 꼽히고 있다. 소설을 뛰어넘는 진짜 역사의 감동! 동양고전 번역의 대가, 김원중 교수가 국내 최초로 옮긴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 진수는 기전체 형식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려 했으나 위, 촉, 오 삼국의 군주가 저마다 황제라고 일컫는 상황에 직면하자 세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는다. 그 까닭은 진수가 벼슬을 한 나라가 진晉나라였는데, 진나라의 전신이 위나라였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정사 삼국지’의 매력 중에 한 가지는 남북조시대 송宋나라의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의 내용과 서술이 너무 간략한 것이 안타까워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후대에 내려오는 ‘정사 삼국지’의 가장 대중적인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자는 방대한 분량의 배송지의 주 가운데 독자들이 꼭 같이 읽을 만한 내용들을 선별해 함께 번역하여 주석으로 엮었다. 이 책은 사마천의 《사기》를 개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완역해, 국내 동양고전 번역의 일인자로 평가받는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의 김원중 교수가 펴냈던 《정사 삼국지》를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 번역과 주석을 다듬어 다시 펴낸 개정판이다. ◎ 촉서 소개 진수가 위나라를 정통에 놓으면서도 촉나라와 오나라에 독립된 역사적 위상을 인정해주려 했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진수는 촉나라 출신이고 촉에서 관리 생활을 했으므로 당대의 중요한 사건을 직접 보고 들었고, 통치자들의 경력을 잘 알았으며, 그 시대의 제도에도 익숙했다. 게다가 그는 《제갈씨집諸葛氏集》이라는 책을 편집했으므로 제갈량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했다.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의지할 것도 없이 노력만으로 천하를 차지하려고 했던 유비는 고향의 대학자 노식盧植에게 사사했으나, 공부보다는 잡기에 능했다. 하지만 평소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다투어 그와 사귀고자 했다. 분명한 사실은 유비는 조조, 손견孫堅(손책, 손권)과는 출생 배경이 전혀 다르고 의지할 만한 지연이나 혈연도 없었다는 점이다. 유비는 형제도 없고, 자식 이외에는 친족도 없으며, 같은 고향 부하도 장비와 간옹簡雍뿐이었다. 따라서 유비가 한 왕조를 부활시킨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유비의 정치적 입지는 후한의 군벌 세력과 다른 점이 있으니,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원대한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가 한실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분투노력한 것은 유가적 가치관과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유비는 겸허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백성을 가장 높은 위치에 두었다. 수십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 조운 등이 온 힘을 다해 지켜주었다. 제갈량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형주목 유표와 친분이 두터웠던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죽자 제갈량은 직접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둔했다. 항상 자신을 관중管仲과 낙의樂毅에 비유했지만, 당시에는 이를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다. 오직 박릉군의 최주평崔州平과 영천군의 서서(徐庶, 서원직徐元直)만 제갈량과 친교를 맺었다. 그 무렵 유비는 신야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가 유비를 만났는데, 유비는 서서를 인물로 생각했다. 때마침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이니 “장군께서 몸을 굽혀 수레로 찾아가야만 합니다.”라면서 만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러 갔는데, 모두 세 차례 찾아간 후에야 비로소 만났다고 한다. 여기서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한 인물은 서원직인데 그에 관한 전傳이 없으니 그의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과장이 적지 않게 들어갔음은 분명하다. 촉은 어떻게 멸망했는가? 263년 10월 위나라 종회鐘會는 18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검각을 지키던 촉나라 대장 강유姜維와 대치하게 된다. 한편으로 관중에서 내려온 등애鄧艾는 음평에서 강유로 들어와 촉을 급습하여 면죽에서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이 이끄는 촉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다. 촉나라 조정은 대경실색하여 투항을 결의했고, 망국의 군주 유선은 도읍 성도의 북쪽까지 온 등애의 군문軍門에서 스스로 손을 묶고는 자신의 죄를 사죄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촉나라는 유비에서 유선으로 이어지는 43년 역사를 허무하게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