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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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보다 얼마만큼 더 인간에 가까운가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욕망에 대한 한 권의 시 “세상에 없을 수밖에 없는 시를 쓰겠다.”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하며 시인은 마음먹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6년이 지났다. 짧지 않은 기다림 끝에 김현의 첫 시집 『글로리홀』이 나왔다. 255쪽에 달하는 “퀴어 SF-메타픽션 극장” 속 차곡차곡 접힌 51편의 시는 ‘덕력’이 있다면 마음껏 두고두고 펼쳐 읽을 법한 축나지 않는 화수분이다. 『글로리홀』은 시집 같기도, 소설집 같기도 하다. SF, 디스토피아, 포르노그래피, 하드코어 야오이물, 팬픽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특정 시기 영미권 대중문화와 하위문화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나 오마주, 부패한 세상을 풍자하는 알레고리, 혹은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나는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김현이 한 권의 시집으로 묶기를 선택한 이 많은 요소들은 결국 우리의, 인간과 세계의 욕망을 드러내며 억압과 결핍을 조망한다. 세상에 없을 수밖에 없던 시(세상에 없던 시, 세상에 있어야 하는 시가 아닌), 퀴어와 섹스와 정치와 SF와 문학과 음악과 영화와…… 인간의 욕망과 세계를 이루는 온갖 은유들로 구성된 이 보랏빛 백과사전은 조금 새롭고 꽤나 낯설어 우리를 퍽 불편하게도 하지만 눈 밝은 사람에겐 몹시 유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당신은 얼마만큼 인간입니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합니까. 인간과 세계, 욕망을 묻는 그 오랜 질문에 대한 스크린 키드의 정직한 대답이 여기에 있다. 욕망들―사전 바깥의 사랑들 저는 인간입니까, 인간이 아닙니까? 인간이라면 어째서 저에게는 영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인간이 아니라면 저는 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당신은 나보다 얼마만큼 더 인간에 가까운가요? 인간은 대체 무엇입니까……_박상수(문학평론가, 시인)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올초 국립국어원은 ‘사랑’의 사전적 의미를 수정했다. 동성애를 조장하고 있다는 종교단체의 항의 탓에 주체를 ‘남녀 간’으로 못 박은 것이다. 『글로리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욕망은 ‘사랑’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사전적 의미 바깥에 있다. 김현의 시에서 화자로 등장하여 사랑을 하는 건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퇴물 포르노 배우, 애초부터 인간이 될 수 없는 로봇, 안드로이드 등이다. 시를 읽으며 어딘지 조금 불편해지는 이유는 성기나 항문 같은 은밀한 부위 혹은 성교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집요하게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김현의 ‘사랑하는 자들’, 그들은 다수가 동의한 규율 바깥에 있다. ‘정상’ ‘평범’ ‘상식’ ‘교양’처럼 바뀌어 불리는 이 허울 좋은 규율은, 조금만 벗어나도 테두리 바깥의 사람들을 찍어 누르는 족쇄가 된다. 정상이라는 억압, 상식이라는 폭력. 더 정상, 덜 정상, 줄을 세워서 더 정상인 자들이 덜 정상인 자들을 핍박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비정상으로 변해가는 줄도 모르고. 김현은 테두리 바깥의 존재들,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밤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견고한 규율에 균열을 더하고 있다. 녀석은 황량하고 사랑스러운 발길질로 나를 걷어찼지. 유리창 안에서 시간에 좀먹은 내가 늙은 신부처럼 나를 나처럼 바라볼 때. 녀석은 똥 묻은 팬티를 끌어올리고 사라지고 아름답고. 나는 면사포처럼 속삭였어. 안녕. 그리고 녀석들을 본 사람은 없네. 아무도. 그래, 아무도. 엉클스버거 냅킨으로 홈타운의 케첩을 닦아내던 우리는 왜 서둘러 늙었을까. 소시지 컬 가발을 쓰고 썩은 맥주를 마시는 오래된 밤. 나는 알 수 없이 노래하네. 카운트다운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궤도 밖으로 로켓을 쏘아 올린 녀석들을 위하여. 안녕, 지금도 축구화를 구겨 신고 자줏빛 여름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글로리홀의 누런 뻐드렁니 호모들의 감정을 위하여. 그리고 건배. ―「늙은 베이비 호모」 부분 시리우스가 팬티를 내렸다. 텐션 페니스사의 음경이 팽팽하게 나타났다. 귀두 아래 박힌 네 개의 다마까지 내 것과 똑같았다. 고독의 형상이 있다면 바로 저 구슬들 같지 않을까. 그제야 나는 시리우스가 건네준 구형 맥가이버칼로 몸을 찢었다. [……] 당신 역시 공산품 로봇에 지나지 않아.[……] 나는 시리우스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 22세기부터 금지된 감정을 끌어 덮었다. 눈을 감았다. [……] 인간이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던 삶의 환희들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 역시 픽션들에 저장된 것일지도 몰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시리우스, 내게도 영혼이 있을까?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입술이 저절로 씰룩였다. 자동 폭파 장치가 가동된 듯했다. [……]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갈까? 시리우스가 물었다.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텐션 페니스사의 이중 분리 음경을 장착한 채 재생산됐다. 그리고 어딘가에 시리우스를 찾아 벌써 이곳, 13행성까지 오게 되었다. ―「어딘가에 시리우스」 부분 픽션들―장르의 교집합, 시적인 구멍들 놀랍게도, 『글로리홀』의 모든 시에는 각주가 달려 있다. 가끔은 독서를 방해해 그냥 넘겨버리기도 하는 각주가 김현의 시에서는 주된 요소로 활용된다. 다만 낯선 의미를 알기 쉽게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히 아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오히려 한번 뒤트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를테면 ‘지구’는 “안드로이드를 폐기하기 위해 세워진 대형 화장로”로, “안드로이드들의 출생, 거주, 이주 행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은하철도 구구구」)다 “행성을 둘러싼 얇고 투명한 자기가 고독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새까맣게 구멍이 나기 시작”(「지구」)한 별이다. ‘뒤틀기’는 각주에서 끝나지 않는다. 김현은 경전, 설화에서부터 소설(「전자양은 안드로이드를 꿈꾸는가」 등), 영화(「커피와 담배」「미스테리어스 스킨」 등), 음악의 구성을 빌려오고, 실존 인물까지 끌어들여 시를 쓴다.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기억을 재구성하고(「폴로네즈Polonaise」), 앤디 워홀의 다른 재능에 주목한다(「블로우잡Blow Job」). 케이트 블란쳇, 마릴린 먼로, 린다 러브레이스 같은 여배우나 보르헤스, 제임스 설터, 마르케스, 오스카 와일드 등 소설가, 오버와 인디를 넘나드는 뮤지션들, 동시대 시인까지 언급된다. 익숙한 이름을 바탕으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서둘러 짐작했던 역사적 사실과 예측들을 비껴 ‘그들인 듯 그들 아닌 그들 같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새로운 시적 구성과 인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시적 영감이 작품으로 완성될 때 그것이 오로지 나만의 것일까,를 묻는 김현의 색다른 정직성에서 출발한 듯하다. 영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시인이 경험한 모든 것에서 영향 받는다. 그러니 시야말로 상호텍스트의 장이 아닐까. 현실과 비현실을, 실재와 가상을, 시간과 공간을, 장르와 장르를 합칠 때 생겨나는 시적인 구멍들이야말로 김현의 위대한 구멍glory hole일 것이다.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케이트 블란쳇을 넘겼다. 나는 담배를 꺼냈다. 케이트 블란쳇은 제네바의 아무도 없는 곳에 있다. 케이트 블란쳇은 속눈썹을 올린다. 케이트 블란쳇은 외국 소설을 펼친다. 케이트 블란쳇은 순식간에 촬영장의 없는 존재가 된다. 유령, 유령, 유령. 케이트 블란쳇은 문자 한 통을 보낸다. 제 얼굴에서 소실점을 찾았어요. 케이트 블란쳇은 케이트 블란쳇에게 중얼거린다.5) 5) 짐 자무시의「커피와 담배」에서 케이트 블란쳇은 1인 2역을 맡아 사촌지간인 케이트와 셸리로 등장한다. 홍보 행사가 열리는 호텔의 라운지에서 케이트, 케이트 블란쳇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셸리, 케이트 블란쳇을 만나게 된다. ―「케이트 블란쳇이 꾸는 꿈에 대하여」 부분 지구1) 푸른 눈은 끝내 볼이 좁은 수도원2) 앞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