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위기를 가로질러 인문학의 목소리를 타전하는 새로운 사유의 모험
근대성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주변’의 언어와 생생한 성찰을 만난다
우리시대의 주변/횡단 총서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와 (주)현암사가 함께 새로운 인문학 비평 총서 ‘우리시대의 주변/횡단 총서’를 펴낸다. 21세기 들어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 종언이 회자 되는 시류에 일기 시작한 인문학 열풍은 어떤 징후일까? 각종 기관과 지자체에서, 기업과 매체에서 인문학 강연이 줄을 잇고 있으나 ‘지속 가능한 성공을 위한 내공’을 강조하는 처세적 주제는 익숙하고 동어반복적이다. 으레 서구의 주류 사상과 문학의 정전을 훑는 요점 정리식 학습은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 즉 여기를 읽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중심을 지향하고 있으되, 역사에서 정치에서 문화에서 경제에서 한국은 주변부다. 다양한 ‘경계’에 걸쳐 있음에도 우리의 담론은 미국과 유럽의 주류 언어로 담을 쳐왔다. ‘우리시대의 주변/횡단 총서’는 우리 사회와 사유의 장에서 빗금 그어져 넘보지 못했거나, 현대-서구-남성-백인-중심의 이분법에 가려진 주변의 작은 언어들을 붙들어보려 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사회와 문화의 이동과 얽힘의 과정을 섬세히 탐구하는 텍스트들을 찾아 펴내려 한다. 개론적인 교과서를 지양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깊이 있는 이론과 비평 에세이들을 소개하려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를 보다 심층적이고 성찰적으로 ‘횡단’하는 사유의 모험을 시작하려 한다.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대변할 수 있는가?
여성 할례부터 ‘위안부’까지 서양 페미니즘의 차별적 시선을 폭로하다
소말리아나 아프리카에 대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그녀들이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지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그녀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그녀들의 노래와 시와 소설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처럼 무지하면서 그 무지마저 망각한 채 ‘보편적 정의’라는 권위적 단어로 그녀들을 이끌고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서양 페미니즘의 뒷면에 숨어 있는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차별 의식을 꼬집고,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신경함과 폭력성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그리고 발화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말과 이름을 빼앗긴 그녀들에게 진정으로 이르는 길을 조심스레 탐구한다. 그녀들의 한숨 같은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응답할 수 있기를, 그래서 진정한 ‘자매애’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는 책이다.
젠더와 식민지주의의 이중구속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건 어떤 일일까? 아니, 그 전에 이름은 누구의 것일까? 흔히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 타인의 사용이 더 많은 이름. 타인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나’의 이름. 이름은 기본적으로 교류를 위한 수단이며 이름 교환은 소통의 첫걸음이다. 저자는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당신이 나를 부르고, 내가 그 부름에 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만나지 못한 만남’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 밝히며 팔레스타인 음식을 주려는 여성의 친절이 귀찮아 모른 척했던 저자는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임을 밝히는 행위, ‘팔레스타인 문화’를 알리려는 그녀의 행위가 민족적 증언이기도 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제3세계 여성은 젠더화된 일상을 겪는 여자이자 거대 세력에 저항하는 민족의 일원이다. 다시 말해 ‘젠더화된 민족적 주체’이다. 저자는 제3세계 여성의 ‘이름’을 부르려면, 즉 그녀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려면 페미니즘과 탈식민지주의라는 두 겹의 렌즈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식민지주의에 대한 섬세함이 결여된, 아니 식민지주의를 자발적으로 내포한 서양 페미니즘 비판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임을 망각한 채 여성 할례를 비판하는 서양 페미니즘의 폭력적 시선
‘무력한 희생자’의 탈을 씌워 타자를 서술하려는 위험한 욕망
서양 페미니즘의 대표적 성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여성 할례 고발’이다. 아프리카 여성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이 ‘미개한 여성 할례’일 정도로, 서양 페미니스트의 고발과 공론화는 성공적이었다. 저자는 여성 할례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확실히 비판적이지만, 이를 야만적으로 바라보고,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가르치려 들고, 문화적으로 해석하려는 서양 페미니즘 또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진정 아프리카 여성의 인권을 고민한다면 왜 ‘여성 할례’에만 핀포인트 조명을 쏘아가며 집중하는가? 아프리카 여성의 빈곤 문제, 식량과 주거 문제, 건강과 고용 문제 또한 여성 할례와 같은 크기로, 혹은 그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 페미니즘이 ‘걱정’하고 ‘계몽’하고자 하는 건 ‘여성 할례’에만 국한된다.
저자는 서양 페미니즘이 ‘나르시시스틱한 자화상’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여성 할례를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즉, ‘후진적인’ 아프리카나 아랍 문화의 ‘야만스러운’ 관습을 ‘문명적’이고 ‘선진적’인 서양 여성이 계몽한다는 위계적 시선에서 여성 할례를 다룬다는 얘기다. 심지어 당사자인 제3세계 여성이 이를 비판하려 들면 ‘폭력을 용인하는 전통 옹호자’로 낙인 찍어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제3세계를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지배자 위치에 있음을 깡그리 잊거나 은폐해버린다. 노골적인 인종주의와 전통 문화에 대한 차별은 덤이다.
피해자이자 희생자로만 간주되는 제3세계 여성들이 아무리 ‘실제 현실’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기각당한다. 그녀들의 저항과 자율 의지는 지워지고 ‘무력한 희생자’, ‘선진 여성이 도와주어야 하는 수동적 여성’만이 남는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성들 또한 스스로 변혁의 주체가 되어 내부로부터 바꾸어갈 힘이 있다. 마치 한국 여성 개개인이 매일 성차별과 맞서 싸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들을 수동적 피해자로 박제하는 것은 서구 페미니즘의 치명적 오류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그런데 계몽의 주체인 서양은 정말 ‘문명적’이고 ‘선진적’일까?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라는 말이 있듯, 전 세계 어느 곳에나 성차별은 존재한다. 제3세계 여성들은 이 점에 대해 묻는다. 어째서 당신들의 성차별은 해결하지 않은 채 우리의 성차별이 ‘전혀 새롭고 놀라우며 야만적인 것’처럼 논하느냐고. 성차별은 어느 나라에서나 고유한 문화의 탈을 쓰고 존재하며, 한 차별이 다른 차별보다 더 ‘진보적’이거나 ‘문명적’이지 않다. 여성 할례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것이 몰역사적 전통 비난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타자와 동화되기보다 자신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목격-증인
메시지는 언제나 ‘이미 잘못 배송’된다
타자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다음에는 반대로 ‘타자와 동일시하는 관점’의 위험성을 논한다. 우리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동화 기법을 사용한다. 우리를 피해자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행위가 사실은 자연스럽지도, 피해자를 위한 것도 아님을 드러낸다. 우리가 늘 누군가를 피해자로서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여 동일화한다면 우리 자신이 가해자일 경우에도 그 가해성을 은폐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의적으로 투영한 목소리를 진실로 믿어버림으로써 실제 그들의 다양한 외침을 묵살해버릴 위험성도 있다. 말을 빼앗긴 사람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말을 가진 자의 사명이지만, 그러기 전에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저자는 공감은 상상으로만 가능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이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