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에밀리 디킨슨 시선 다섯 번째
지금은 납의 시간
장엄한 천상의 아픔
불가피한 필연, 고통과 상실, 죽음, 그리고 위로
물은 갈증이 가르쳐주지
땅은 — 지나는 대양이
이주는 — 격통이 —
평화는 들려준 평화의 전투가 — 사랑은 빚어낸 기억이 —
새는 눈雪이 (123쪽)
파시클의 다섯 번째 에밀리 디킨슨 번역시선 『아니면 마자린 블루를 입은─ 정오를?』이 출간됐다. 총 59편의 에밀리 디킨슨 시가 8장에 담겼다. 그간 앞서 나온 시집에서는 정원에서 발견한 작은 벌레와 꽃, 그늘과 태양을, 평범하지 않은 존재의 고독과 담담함을 읊조리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슬픔, 친구와 나누는 소소한 기쁨을 시에 담았다면, 그와 함께 내내 다루었던 고통과 죽음이 이번 시집의 본격적 주제가 되었다.
“아프고 외롭고 슬픈 순간에 반전처럼 통찰을 보여줄 때 특히 디킨슨 시의 매력이 빛을 발한다. 디킨슨이 그리는 지고의 세계는 귀족적이고 고결한 순백의 제국 혹은 천상계지만, 막상 주목한 주체들은 세상을 주도하는 절대 주권자 주인이기보다 세상의 주목 밖으로 물러나 은둔하는 작은 존재들이다.” (번역후기)
본문에는 번역과 함께 원문이 된 영문 시를 함께 실었는데 원문 텍스트는 에밀리 디킨슨 아카이브에 올라와 있는 시인의 필사 원고를 바탕으로, 번역문학가이자 파시클 대표 박혜란이 직접 기획하고 선택하여 편집, 번역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제목이 없어서 차례에는 각시의 첫 행을 두었다. 가급적 시인의 단어 선택, 시행 구분, 연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여 원문 텍스트를 구성, 그를 바탕으로 번역했고 디킨슨의 필사 원고를 텍스트로 번역하였기에 20세기에 출간된 디킨슨 전집들에 기반한 기존 번역들과는 시의 구성과 내용이 다소 달라 이전에 볼 수 없던, 신선하면서도 고전적인 디킨슨의 시 세계를 소개한다.
작품 하나하나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고 예리하게 써 내려간 에밀리 디킨슨의 원문을 가능한 한 뭉뚱그리거나 의역하지 않고 생생히 살리려는 번역자의 애정 어린 시선과 손길이 담겨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통찰이라는 반전
삶의 고통과 고독, 상실의 순간은 에밀리 디킨슨의 가장 중요한 시적 소재로, 시인의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출판된 작품들에서 시인은 때로 관습에 괴로워하면서도 절대 함몰되지 않는 여성을 그리기도 하고, 깡충거리는 캥거루와 정원의 작은 벌레와 풀, 꽃들을 보고 경탄하고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랑하는 존재들을 잃는 슬픔과 고통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 양가의 감정이 공존하는 진실을 정직하고도 절묘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에밀리 디킨슨의 놀라운 힘이 아닐까?
기획하고 번역한 번역자는 마자린 블루의 색상이 대표할 아주 우울하고 어두운 내면의 시를 소개하고 싶었다고 한다. 죽음조차 부정적 감정의 비탄만으로 맺지 않는 신비로운 세계를.
나는 나의 존재를 돌리고 돌리다
발소리가 나면 잠시 멈추어
누구인지 이름을 물었다 —
혹시라도 내가 아는 소리일까 싶었다 — (151쪽)
내게는 미워할 시간이 없었다 — 왜냐하면
무덤이 나를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 삶은 그리
광대하지 않아 나는
증오를 — 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할 시간도 없었다 — 그러나 (49쪽)
지금은 납의 시간_ 고통의 무게와 위로
이 책의 여덟 장 중 가장 많은 시가 들어있는 “지금은 납의 시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과 통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갖가지 통증의 마음을 속속들이 펼쳐내는 시인의 언어에 귀 기울이다 보면 통증이 생생해 고통스럽다기보다는 한편으로 위로를 받는 기분,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눈부신 의학의 혜택을 입는 현대에도 인간은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서일까.
의학이 현재와 현저히 뒤떨어졌을 시인의 시절에는 죽음과 병의 고통이 일상적이었고 문학과 종교의 빈번한 소재였던 시기적 특성을 간과할 수 없다. 삶의 후반기에 특히 가족을 포함한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었고 시인 스스로도 성장기부터 늘 약한 몸으로 학업이나 생활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죽음을 이야기할 때 디킨슨은 특별해진다.“ (번역 후기)
이번 시집은 시작은 죽음의 순간을 포착한 시의 매력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디킨슨의 시는 의식이 종결되는 순간 결코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좌절이나 괴로움에 대한 감상에 젖거나 아마도 섣부른 위로나 애도에 빠지지 않는다. 시의 화자는 죽음의 주체이면서 죽음의 관찰자이고 또한 죽음을 구경하는 이를 바라보는 죽어가는 이이기도 하다. 죽음의 순간에도 의식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죽음의 과정을 인식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보면, 시인은 사후의 삶이나 천국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죽은 뒤 구원과 심판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적 구원관과는 조금 다른 입장인 것 같다. (번역후기, 163쪽)
지금은 납의 시간 —
더 오래 살면 기억하겠지
얼어붙는 사람들처럼 눈雪을 떠올려봐 —
처음엔—오싹—그다음엔 무감각—그리고 놓아주기— (85쪽)
우리가 아는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누군가에겐 여전히 경이로울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역경처럼
시야에 언덕 하나 들어왔지만
언덕 뒤는 마법이라
모든 것이 미지다
혼자 언덕 오르는 걸
이 비밀이 보상해줄까? (139쪽)
파시클과 번역
생각날 때마다 생각에 맞는 단어를 찾았다
딱 하나 — 내게 반항하는 —
것이 — 있었다 —
한 손이 분필로 태양을 적어
어둠이 양육한 — 종족에게 주려 했던 그런 것이었다 — (27쪽)
<파시클>은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으로 내러티브 이론을 공부하였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 중 에밀리 디킨슨 시를 읽으며 점차 매료되어 페미니즘 시학으로 전공을 바꿔 연구해온 번역문학가 박혜란이 에밀리 디킨슨 시를 번역해 모아 한 권 한 권 시집으로 만들기 위해 설립한 출판사다.
<파시클>은 앞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시리즈로 첫 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시작으로 시선 시리즈를 펴내고 있으며 그림시집 『멜로디의 섬광』 『어떤 비스듬 빛 하나』 『바람의 술꾼』 『장전된 총』을 펴낸 바 있다.
파시클의 에밀리 디킨슨 시선 시리즈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2018, 에밀리 디킨슨 시, 박혜란 고르고 옮김)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2019, 에밀리 디킨슨 시, 박혜란 고르고 옮김)
마녀의 마법에는 계보가 없다 (2019, 에밀리 디킨슨 시, 박혜란 고르고 옮김)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 (2020, 에밀리 디킨슨 시, 박혜란 고르고 옮김)
<신간>
아니면 마자린 블루를 입은 - 정오를? (2022, 에밀리 디킨슨 시, 박혜란 고르고 옮김)
*<파시클>은 또 에밀리 디킨슨이 필사한 자신의 시를 모아 손수 제본한 각각의 책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에밀리 디킨슨을 보는 다양한 해석과 시각, 새로운 접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