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멀지 않은 돌봄, 자본의 횡포,
달라진 환경과 새로운 윤리의 들끓음 속에서 여전히 소외된 동물들의 삶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주어로 삼아 대화하는 공론장의 탄생
동물을 집 안에 들이거나, 길에 사는 동물의 밥을 챙겨주거나, 고통 속에 죽임당하는 동물의 수를 줄이기 위해 고기를 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동물의 안위와 생존을 걱정하는 것을 넘어 동물에게 가족이나 시민의 지위를 주자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오늘 한국의 도시인들은 늘 곁에 살았던 동물들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다소 위태로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진심, 선의, 사랑 같은 말로 표현되는 이 실천들이 각 종의 고유한 특성이나 그 생태적 작용, 달라진 현대 도시의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혹은 인간과 얼마나 가깝게 지내는가라는 ‘관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집 앞에 찾아오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그 고양이의 허기를 잠시 달래기는 하겠으나, 길에서 떠도는 고양이의 개체 수를 늘려 이들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고양이 밥을 먹으러 온 너구리, 비둘기, 까치 등 다른 동물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 ‘반려동물’이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은 개에게 ‘귀여운’ 돌봄의 대상이라는 역할을 부여해 개를 점점 더 작고 약하고 통제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반면 ‘가족’이 되지 못한 동물들은 보호의 범위에서 배제되거나 혐오의 시선 속에 놓일 수 있다. 집 앞에서 굶주린 쥐를 보았을 때 밥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관계 속에 동물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는 왜인지 불편하다. ‘관계’로 동물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존중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친족이나 가족이 되지 않더라도 동물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을까? (…) 실제로는 일방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친 관계를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현실에서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종류의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 개를 주인인 ‘나’와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더 깊숙이 종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어른’으로서의 개를 지워버린다. (…) 개를 무엇으로 규정하든 개는 개로 존재한다. 떠돌이든 반려동물이든 혹은 식용견이든 실험견이든 개는 개다. (…) 개에게 필요한 것을 고민하고, 개를 개 자체로 존중하면 좋겠다. 그 존중은 개가 가족이거나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개라서 받는 존중이어야 한다. - 66~79쪽
여전히 많은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는다. 길조였다가 유해야생동물로 전락한 까치, 갑자기 개체 수가 늘어났을 뿐 인간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러브버그, 먹이를 찾으러 왔다가 번쩍이는 네온사인에 길을 잃어 민가에 들이닥치기도 하는 멧돼지는 ‘너무 많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한다. 길고양이의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야생동물은 대량으로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때는 마을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했던 백로는 깃털이 날리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서식지에서 쫓겨나고, 연간 20만 마리가 사냥이나 교통사고로 죽는 고라니는 멍청하게 차를 피하지 못해 죽는다며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저자는 인간의 불편함이나 혐오감을 이유로 동물을 무심히 죽이거나 쫓아내는 여러 장면들을 통해 우리의 종 편향과 빈약한 윤리, 부족한 생태적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나아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지극한 돌봄을 받는 동물들도 실은 실내에 가두어진 채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디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행처럼 사용되는 ‘돌봄’이라는 말이 내포한 폭력과 동물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에 대한 멸시에 대해서도 성찰해보자고 제안한다. 권리, 자유, 해방, 돌봄과 같은 개념들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옮기고 식당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멧돼지를 그냥 내버려두란 말인가’, ‘병들거나 버려진 동물은 다 안락사를 하자는 말인가’, ‘공장식 축산을 옹호하는 것인가’라며 반감을 표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질문들에 단 하나의 답을 내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거나 ‘다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식의 둔탁한 주장을 넘어 각 동물이 처한 상황과 생태적, 사회적, 정서적 파장을 고려한 신중하고 섬세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뜻에서 쓰였다. 동물을 진정으로 위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이 어렵고 복잡한 논의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 일이다. 내가 키우는 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육류나 가죽 제품을 덜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왜곡된 동물 사랑에 제동을 걸며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주어로 삼아 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뜨겁고 치열한 공론장이다.
‘야생동물이 너무 많다’는 인식은 인위적 개입으로 생태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자, 야생동물에 경쟁심과 공포, 낯섦을 느끼는 이들의 민원에 대응하는 관료제의 정책 근거다. 얼마나 많아야 많은 걸까? 그에 대한 판단은 자연과학이나 편견, 감정 어느 하나에만 기대지 않고 복잡한 사회관계의 차갑고 뜨거운 부침에 따라 달라진다. 판단을 해도 되는지 망설이는 것 역시 하나의 판단이다. 우리는 이제야 동물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행위가 동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야생동물이 너무 많다는 판단도 조금은 더 조심스럽게, 덜 폭력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 217쪽
변화하는 도시와 달라진 사람들,
휘청거리는 동물들의 삶
이 책은 동물의 삶과 죽음, 번성과 절멸을 통해 본 한국 현대사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저자가 소개하는 동물들의 삶에는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독재, 반反생태적 개발주의, 시장의 지배, 소비자 정체성과 개인 미디어를 갖춘 시민들의 등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격렬한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1970년대 독재정권이 벌인 ‘전국 쥐잡기 운동’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라’, ‘사회를 좀먹는 존재는 박멸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기에 적절한 이벤트였고 죽어가는 동물의 고통 따위는 고려하지 않던 시대라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무분별하게 사용한 쥐약 때문에 여우를 비롯해 여러 종의 포식동물이 남한에서 사실상 절멸하고 말았다. 1980~90년대에는 정력에 좋다면 무엇이든 잡아먹는 ‘보신 열풍’이 불었다. 곰, 여우, 늑대, 너구리, 고라니, 오소리, 까마귀 등 온갖 동물을 잡아먹는 통에 상당수의 종이 절멸하거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인간은 늘 야생동물을 잡아먹고 살아왔지만,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사고파는 시대에 접어들어 야생동물을 사고파는 ‘산업’이 등장하면서 이전과 다른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고라니가 살아남은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에게 고라니가 쓸모없는 동물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뿔이 중요한 약재로 쓰이는 문화권에 속하는데, 공교롭게도 고라니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뿔이 없는 사슴이다. 고라니와 달리 뿔을 가진 대륙사슴(혹은 꽃사슴)과 노루는 뿔을 약재로 쓰려는 사람들에 의해 멸종되거나 개체 수가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 뿔이나 가죽, 사향처럼 동물의 신체가 값비싼 ‘상품’이 되고, 그 상품의 거래가 ‘산업화’되는 일이 특정 종에게 일어날 때 그 종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고라니는 시장에서 팔 만한 부위가 없는 동물이라서 살아남았다. 야생동물의 멸종을 이야기할 때는 꼭 ‘서식지 파괴’와 ‘밀렵’이 그 원인으로 따라붙는다. 그러나 특정한 몇몇 종이 멸종한 역사를 돌아보면, 거기에는 분명하고 직접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멸종이라는 사건은 ‘인간의 욕심’, ‘환경 파괴’ 같은 흐릿하고 넓게 펼쳐진 이유로 일어나지 않는다. - 185~186쪽
과거에는 마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