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반물질의 힘에 잠식돼 사라지기 시작하고 영웅들은 물론 악당들까지 이를 막기 위해 악전고투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정의감, 사명감, 지배욕, 초능력 심지어 사랑의 힘마저도 지구 멸망이라는 예정된 결과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하나의 지구가 아닌 여러 지구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이 전 우주적 비극의 뒤에 도사리고 있던 존재는 절대악 안티모니터.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주 모처의 한 위성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미래를 기약하는 이가 있었으니, 안티모니터의 쌍둥이 형제격인 모니터였다. 그는 자신의 조수 하빈저를 시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안배를 시작한다. 안티모니터가 의도하는 우주 멸망에 맞설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능력치를 가진 영웅과 악당들을 각각의 지구에서 소환한다. 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모니터는 어떤 원리로 여러 개의 우주, 여러 개의 지구가 생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안티모니터의 반물질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칠흑 같은 절망 앞에 드러난 한줄기 빛과 같은 사건이었지만 모니터는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고 영웅과 악당을 불문하고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다시 극심한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다. 한편 또 다른 지구에서 조커와 대적하던 배트맨 앞에 행방불명 상태이던 플래시가 느닷없이 나타나 의문의 메시지를 남기고 재가 되어 사라진다. 플래시가 남긴 마지막 말은 “세상이 없어지고 있어. 구해 줘….”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배트맨은 슈퍼맨을 호출한다. DC에서 처음에 <크라이시스>를 기획하게 된 것은 DC 자체의 문제 때문이었다. 수많은 영웅과 악당들이 오랜 세월 활동하면서, 필연적으로 연속성의 문제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 태어나 아무런 초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배트맨이 2차 세계대전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오는데 1980년대에도 여전히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모순부터 시작하여 여러 캐릭터들이 각자 다른 작품에서 활동하다 보니 스토리가 뒤섞이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DC에서 도입한 개념이 멀티버스(multiverse) 즉, 다중우주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하나가 아닌 다수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다중우주 개념은 현대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분야이며, 우주를 설명하는 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 중 하나이다. 이 다중우주가 도입되면서 DC 유니버스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여러 우주에 각각의 지구가 있고, 이 지구에 또 각각의 슈퍼맨과 배트맨, 플래시가 조금씩 다른 배경을 갖고 살아간다는 설정은 시간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연속성과 배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에서는 이 멀티버스 개념을 바탕으로 지구-프라임, 지구-1, 지구-2, 지구-3 등 복수의 지구 영웅과 악당들 그리고 거대한 존재들이 대충돌한다. 저자인 마브 울프만은 수습 불가능 상태로 꼬인 DC의 세계관을 재정립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이 작품을 써내려갔고 마침내 모순되는 세계관에 불만을 품고 DC를 떠났던 팬들과 DC코믹스에 새롭게 입문하려는 독자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희대의 걸작을 완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