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리스트 제외 조치로부터 2년,
한일 전문기자가 바라보는 지난 갈등의 모든 것
불의의 일격이었다.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A4 한 장 분량의 짤막한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첫째는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절차에 들어간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오는 4일부터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 꼭 필요한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를 포괄수출허가제도의 대상에서 제외해 수출규제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댄 일본의 습격에 모두 할 말을 잃었고, 놀란 시민들은 거리로 달려나와 “반(反)아베” 구호를 외쳤다. “(일본 제품을) 사지 않습니다, (일본에) 가지 않습니다”, “보이콧 재팬” 등 불매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편의점에서는 ‘아사히 맥주’가 놓인 자리가 사라졌고, 인스타그램에서는 ‘#일본여행’이라는 해시태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여기, “사지 않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에서 나아가 지난 한일전의 진상을 철저하고도 집요하게 파헤치는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 길윤형은 약 3년 반만의 〈한겨레〉 도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2017년 10월에 펴낸 책 《아베는 누구인가》에서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이어진 한일 갈등이 “앞으로 닥칠 거대한 불화의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즉 역사 갈등이 시작이었지만 이면에서 꿈틀대던 또 다른 거대한 움직임을 눈치챈 것이다. 저자는 이를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두 개의 지정학적 충격이 가지고 온 “동아시아의 신냉전화”라고 표현한다. 《신냉전 한일전》은 이렇듯 동아시아 신냉전 시대에 마주한 결정과 갈등과 대립의 순간들을 담았다.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2018년 1월), 평창겨울올림픽(2018년 2월), 판문점 회담(2018년 4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2018년 6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2018년 10월), 한일 초계기 갈등(2018년 1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2019년 2월), 화이트 리스트 제외 방침 결정(2019년 7월), 지소미아 종료 결정(2019년 8월), 지소미아 종료 결정 철회(2019년 11월) 등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한국과 일본은 뒤치락엎치락 외교전을 벌였다. 이 흐름에 끈질기게 따라붙은 저자는 한 장면 한 장면 차분하고 냉정한 복기를 통해 현상의 본질에 바짝 다가섰고, 정확하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독자에게 낱낱이 전한다. 그리고 뼈아프게도 이 처절한 외교전에서 한국이 패배했다고 평한다. 책은 2015년 12·28 합의를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일 갈등의 모든 대목을 말한다. 사상 최악의 관계로 치달은 양국의 구조적 갈등을 분석하고, 어렵지만 해법을 모색하는 시도도 잊지 않는다. 일본의 보복 조치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얼마나 제대로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마주 대할 시간이 다가왔다.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만큼 가슴 아픈 순간들을 기록하면서도 되도록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해 동아시아의 냉전 체제를 허물 기회가 우리에게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지난 실패를 복기하는 이 책이 향후 대일정책을 세우는 데 반면교사가 되길 기원한다.”(21쪽)
‘좋았던 옛 시절’을 지나
양보 없는 정면 대결에 이르기까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는 크게 세 시기를 거쳐왔다. 살벌한 냉전 질서 아래,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했던 1기(1965~1980년대 말)가 있었고, 이어서 냉전이 해체된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기 전인 2000년대 말까지로 구분되는 2기가 있었다.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맺은 한일 파트너십 선언(1998년) 등으로 대표되는 ‘좋았던 옛 시절’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3기, 동아시아의 신냉전에 관해 힘주어 말한다.
중국의 부상에 맞서고자 미국과 동맹 강화에 나선 일본에게 ‘한미일 3각 동맹’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안보의 기본 축이었다. 지난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기본 전제였던 평화헌법과 반성적 역사 인식이라는 두 기둥을 처참히 무너뜨린 아베 신조의 등장은 우리에게 심히 좋지 않은 징조였지만, 신냉전의 거센 흐름 속에서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3각 동맹을 중시하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렇게 2015년 위안부 문제를 12·28 합의로 봉합했고, 그 기반 위에 2016년 지소미아를 체결했다. 이 시점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한다. 2016년 말 촛불혁명이었다.
이어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12·28 합의를 무력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국면 전환에 나선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며, 동아시아 냉전 구조를 깨트리는 ‘현상변경’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고, 그 힘으로 북한과 중국을 억제해야 한다는 일본의 ‘현상유지’ 전략과 충돌한다.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 문제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화해하기 힘든 전략적 관점 차이.”(20쪽) 이것이 바로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2018년 이후의 파국을 가져온 크고 주요한 요인이다.
국가의 위신을 걸고 벌인 외교전,
한국은 어째서 패배하고 말았나
2019년 8월 8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진행한 제64차 통일전략포럼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야 하나?’에 토론자로 참석한 저자는 “아베 총리는 히틀러의 길을 가고 있다”(11쪽)는 말을 필두로 한 김민석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을 듣고 만감이 교차한다. 이번 사태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이해가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음모론적 오해’에 그친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집권 여당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책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어긋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정부는 일본의 보복 조치를 ‘침략의 전 단계’로 인식했고, 곧바로 지소미아 연장 문제와 연결 지으며 정면 대결로 치달았다. 이를 두고 저자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세 변화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맥락을 거세한 판단이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상대의 의도를 지나치게 악마화했고 흥분했으며, 그래서 불리한 전쟁터에 전 병력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14쪽)고 지적한다.
책은 지난 외교전에서 일관되게 드러난 ‘재팬 패싱’ 기조에 관해서도 꼬집는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 대치하는 ‘북핵(안보)’과 ‘위안부(역사)’라는 두 개 전선 모두에서 현상변경을 시도했다. 먼저 북핵과 관련해서는 평창겨울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어 남북 대화의 기회로 삼고, 한반도 평화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그림을 그렸다. 이 호소에 북한이 화답하면서 2018년 초부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동아시아의 냉전 질서를 단숨에 걷어낼 기세로 급물살을 탄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며 미국과 대화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자, 평창을 통해 시작된 남북 대화는 미국을 끌어들이는 전 세계적 이벤트로 격상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던 기적이 연출된 것을 두고, 저자는 “남북 대화를 주도하고 북미 접근을 유도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야겠다는 흥남 출신 탈북민의 아들인 문 대통령의 ‘집념’, 국가 핵무력을 완성한 뒤 경제개발에 나서고 싶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욕심’, 오바마 대통령을 좌절시킨 미국 최대의 외교 난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허영’이 하나의 거대한 화학 작용을 일으켰다”(72쪽)고 분석한다. 그리고 첫 대결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따낸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반응이 냉담하기 그지없는 데 주목한다.
한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문재인 정부는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