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우아하게 젠더살롱

박신영 · 사회과학
1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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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일상에서 펄떡이는 구조적 성차별, 거침없이 우아하게 대응하는 비상 구급약. 특유의 감칠맛 나는 스토리텔링으로 역사를 유쾌하게 전달하는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가 이번에는 가부장제가 어떻게 이야기로 약자를 지배하는지,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일상에 스며 있는지를 역사와 문화와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통해 풀어냈다. 역사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당연한 듯 전해지는 여성 혐오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알아내고, 명확하지 않았던 차별의 구조를 선명하게 밝혀낸다. 역사와 이야기의 유래를 추적하다 보면 지금의 잘못된 현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여성들의 의식은 급격히 깨어 앞서가는데, 다른 세대와 성별의 의식은 아직 이에 미치지 못한다. 구조적 성차별을 개인의 인성이나 성격적 결함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문제는 더욱 위험해진다. 외부에 있는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들면 탈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에게 이 책이 비상 구급약이 되길 바란다. 당장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으니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정리할 관계는 ‘거침없이’ 정리하고 자신의 인생에 ‘우아하게’ 집중하라고. 가부장제의 역사가 반영된 이야기를 통해 차별과 혐오가 작동하는 구조를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라고. 여기 젠더살롱에 모두 모여 다른 시대를 열어갈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저자는 제안한다.

'그부호' 잇는 독보적 감성

비주얼 마스터 웨스 앤더슨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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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부호' 잇는 독보적 감성

비주얼 마스터 웨스 앤더슨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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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다른 시대를 열어갈 이야기, 젠더살롱 4 1부 결혼할 때 남자가 집 장만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 차별? 13 일하는 여성은 관기가 아니다 21 딸처럼 여겨서 그랬다고? 29 쇼트커트 하면 페미라고? 39 사랑하는데 표현만 거칠 뿐이라고? 47 낙태권을 주장하면 ‘페미나치’라고? 56 오빠가 허락하는 낙태는 합법, 그 외는 불법? 63 왜 여자라 재수 없다고 말할까? 71 가성비 좋은 혐오와 차별의 정치 78 가해자에게는 미래가, 피해자에게는 과거가 있다? 88 2부 부풀린 코드피스와 실체도 없는 메갈 손 소동 97 어린 남성에게 성추행할 자유를 주려는 이유 106 차별은 할머니, 어머니 세대가 받았는데 왜 젊은 여성들이 불만일까? 113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121 흙수저 남성만 불쌍할까? 129 왜 어린 여성에게만 위문할 의무를 강요할까? 137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씌운 ‘여적여’ 굴레 145 남성들은 왜 어머니를 욕하는 말에 흥분할까? 154 일부러 굽은 솔로 만드는 이유는? 162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에 가려진 헬렌 켈러 169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역사와 일상에 깊이 스며 있는 구조적 차별과 혐오 정리할 관계는 ‘거침없이’ 정리하고 자신의 인생에 ‘우아하게’ 집중하자! 역사 에세이스트인 박신영 작가는 직장 내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소송 끝에 승소한 경험을 담은 미투 에세이 《제가 왜 참아야 하죠?》를 2018년에 펴냈다. 이번에는 5년 만에 이야기를 통해 생각을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하여 약자를 지배하는 방식과, 시나브로 젖어 든 차별과 혐오가 일상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거침없이 우아하게 젠더살롱》에 담아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빈번히 자행되는 현실에서, 차별하지 말라고 외치는 여성들에게 자신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고 남성들이 대응하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기득권이 약자 집단을 차별하고 지배하는 방식 중 하나는 차별당하는 대상들을 오히려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서 스스로 언행을 검열하게, 즉 알아서 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말은 남성을 2등 인간인 여성처럼 취급하지 말라는 뜻이다. 법적, 제도적 성차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성차별은 현실에서 일어난다. 차별은 사회 성원의 참여와 묵인 하에 이뤄진다. 일상에서 사람들을 은은하게 세뇌하여 성차별을 문화로 만들어 그 문화에 젖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바꾸자고 한들 쉽게 바뀔 리가 없다. 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고방식을 지니고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하기에 구조 자체가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을 자유민과 노예의 중간, 인간과 가축의 중간으로 여기는 고대 가부장의 망탈리테를 가진 사람도 지금 21세기 내 옆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성차별주의자들을 일일이 설득할 필요는 없다. 개인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탓하느라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정리할 관계는 거침없이 정리하고 자기 인생에 우아하게 집중했으면 좋겠다. _‘들어가며’ 중에서 성차별주의자 개개인을 일일이 설득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더욱 최악의 상황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여성을 혐오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주변에서 ‘거침없이’ 정리하고 자신의 인생에 ‘우아하게’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의 역사를 통해 성차별의 구조를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부장이나 남성의 권력 행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고대인의 망탈리테 매일같이 끔찍한 성범죄 관련 뉴스가 쏟아진다. 그중에서도 친족 성범죄는 빈번히 벌어질뿐더러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만다. 저자는 친족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범죄가 그대로 묻히거나, 밝혀지더라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이유를 역사에서 찾는다. 현재 벌어지는 각종 성폭력 사건의 바탕에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남성의 권력 행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고대인의 망탈리테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망탈리테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뜻한다. 남성의 권력 행사에 대한 역사적 사례는 지금으로부터 3,750년 이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법전에 따르면, 범죄를 저지른 남자는 처자식이나 하인, 노예에게 대신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었다. 식솔은 가부장의 ‘소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원칙은 간통죄나 강간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강간당한 여성이 아니라 그 여성의 남편이나 아버지였고,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가부장에게 그 ‘손해’를 배상해주어야 했다. 이 오래되고도 낡은 법전이 뒷받침한 논리가 지금까지도 줄곧 살아 내려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끔찍할 정도다. 바로 이런 고대의 법에 기반한 사고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친딸, 의붓딸뿐 아니라 학생이나 수용시설 원생, 직원 등 딸과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보호나 지도를 받는 어린 여성을 성폭력하는 남성들에게로. 이들의 머릿속에 박힌 ‘처자식은 내 재산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법을 개정하고 형벌을 강화해도 소용이 없다. _33쪽 여전히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나이 든 남자들이 어린 여성을 성추행하고도 “딸처럼 대해줬는데!”라며 분노하는 것이다. ‘비록 죄는 지었지만 내 딸 같은 여자에게 한 짓이니까 큰 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은 여전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처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갖길 원한다. 그렇기에 성차별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정작 차별당한 건 앞선 세대의 여성들이지 너희들은 아니지 않냐고, 평등하게 교육받고 법적으로도 차별받는 일은 없지 않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성차별을 비교하려면 다른 세대 여성이 아니라 같은 세대 남성과 비교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한편 성차별주의자들은 낙태권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페미나치’로 몰아가기도 한다. 오, 내가 내 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게 나치라니! 나치 독일사를 살펴보면 여성을 단지 인구를 늘리기 위한 출산 도구로 취급하거나 정책과 법률로 정해서 낙태를 금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나치에 가까운데 무슨 소리란 말인가? ‘페미나치’라는 말은 특히 성차별주의자들이 “페미니스트들은 낙태권을 요구하는 살인마 집단”이라는 주장을 펼칠 때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살인 면허권’이 아니다. 자기 몸에 대해 온전한 통제권을 갖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안전한 임신 중단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2차대전을 전후하여 나치가 저지른 대학살에 빗대는 것은 의아할뿐더러, 역사 왜곡에 가깝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과거 나치가 벌인 일과 그들이 내건 명분은, 살펴보면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오히려 성차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같기 때문이다. _56~57쪽 그렇다면 남성들은 왜 낙태권을 공격하는 걸까? 모든 자원을 토지에 의존했던 옛날에는 인구가 늘면 식량을 찾아 이동하든가, 땅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선택한 방법이 바로 피임과 낙태 혹은 영아, 특히 여아 살해였다.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는 이유는 결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국가가 여성의 몸과 생산 능력을 조종하고 가부장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처자식은 가부장의 소유물로, 죽이거나 살릴 수도, 팔 수도 있었기에 당연히 낙태권은 가부장의 권리였다. 여성의 이익이나 권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막강한 권리를 여성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소유물이니까. 여전히 동료 여성에게 성폭력을 일삼는 시대를 거슬러 온 듯한 사람들 우리는 여전히 조선 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남성들을 마주하곤 한다. 아직도 뉴스에서는 밥을 차려주지 않는다거나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며 아내나 어머니를 때려죽이는 남자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가부장이 처자식의 생살여탈권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성들이 많은 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직장에서도 동료 여성들을 상대로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는 남성들이 많다. 저자는 이 또한 역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바로 여성 전문직에 대한 처우다. 조선 시대 여성은 대개는 집 안에 머물러 있었으나, 간혹 전문직에서 일하는 여성이 있었다. 궁녀, 의녀, 관기였다. 이들은 전문직 공무원이면서도 남성들에게 성 노리개 취급을 받으며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근대에도 일하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대하는 의식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21세기에도 변함없이 동료 여성에게 자행하는 성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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