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리 작품집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 · 소설
2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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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관리의 비참한 생활, 몰락 지주계급을 현실적으로 그린 러시아 리얼리즘의 창시자 고골리 작품집! 눈물을 통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신랄한 현실 비판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내포한 작품〈외투〉와, 현실과 초자연을 혼합한 듯한 기묘한 환상적 분위기 속에서 기상천외한 사건이 전개되어가는 특이한 작품〈코〉, 그리고 고리대금업자 노인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수도원에 들어가 금식 기도로 영혼을 정화함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내용의〈초상화〉등 고골리의 걸작 3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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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이 책을 읽는 분에게 05 외투 17 코 82 초상화 139 연 보 252

출판사 제공 책 소개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고골리의 창작 활동은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그가 문명文名을 얻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1828하고도 한참 후의 일로, 옛날 우크라이나의 민족 생활을 묘사한 〈지카니카 근교의 밤〉1831~1832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 다음에 《미르고로드》라는 단편집을 냄으로써 일약 문학상의 명성을 떨쳐 주코프시키와 푸슈킨의 서클에 소개되었다. 이 두 시인은 고골리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쌍수를 들어 그를 맞았다. 이렇게 러시아 문학은 고골리와 더불어 새 시기로 접어들었다. 러시아의 문예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고골리 시대'라고 불렀다. 고골리가 소러시아의 생활을 소재로 하여 쓴 소설에 내포되어 있는 유머나 위트에 대해 관념을 주려고 하면, 많은 작품에서 인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생의 충실을 맛보는 청년의 선량한 웃음으로, 부유한 농부나 시골 아낙네나 촌 대장장이 등의 주인공을 희극적 위치에 앉히고, 그것을 보고 웃는 웃음인 것이다. 그는 행복으로 가득 찼고, 어두운 생각으로 인생의 기쁨을 흩뜨려 놓는 일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은 무리하게 희극화되지 않고 항상 세심하게 현실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고골리의 희극적 천분이 참 '유머'라고 할 만큼 인정받게 된 것은 겨우 만년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즉 희극적인 환경과 슬퍼할 인생의 실체와의 사이에 일종의 대조, 푸슈킨으로 하여금 '그 웃음의 배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눈물을 느낀다'고 고골리의 작품에 대하여 말하게 한 것은 만년의 일이다. 고골리의 작품 중 〈이반 이바노비치와 이반 니키포로비치가 싸운 이야기〉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가장 유머가 풍부한 이야기이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 Nikolai Vasil'evich Gogol' 는 1809년 우크라이나의 소로친츠에서 소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영지 바실리예브카 촌에서 자랐다. 그의 12형제 남동생 5, 여동생 6 중 성인으로까지 자란 사람은 고골리와 여동생 넷뿐인 것으로 보아 타고난 약한 체질의 가계였던 것 같다. 아버지 바실리는 상당한 문재文才가 있던 인물이었고, 어머니 마리아는 신앙심이 돈독한 부인이었다. 그는 1828년 네진 시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즉시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하여 관리가 되었다. 1834년 그는 작가로서 문명을 얻으면서 주코프스키의 알선으로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역사학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그의 역사학 강의는 한 마디로 우스워 참을 수 없는 희극이었다고 한다. 그는 위대한 작가이며 우스꽝스러운 역사학 교수라는 아이러니 속에 모든 생활과 인격을 일관시켰다. 우리는 거기서 그가 러시아 사상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35년 12월 그 조교수직을 사임하였다. 1834년부터 35년에 걸친 이 시기는 고골리의 창작력이 폭발적으로 솟구치던 때로서 대학 강의에 충실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여기 소개되는 〈코〉도 이 때에 쓰여진 것이다. 그후 그는 관료주의의 부패를 통렬히 비난한 희극 〈검찰관〉1836을 발표하여 물의를 빚고 러시아를 떠났다. 그러고는 1848년까지 두 번 잠깐 귀국한 것을 제외하고 거의 12년간을 외국에서 지냈으며, 그 동안 〈죽은 혼〉제1부, 1842을 썼다. 고골리는 하느님의 광명에 비쳐진 진실의 길을 걷고 있음을 확신했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자기 영혼의 정화를 위해 정해진 길이었다. 1848년 1월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4월에 귀국하여 다시 외국에 나가지 않고 〈죽은 혼〉 제2부를 쓰기 시작했다. 1852년 1월 하순, 전부터 종교상의 지도를 해주던 신부 마트웨이 콘스탄지노프키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2월 5일까지의 사이에 그를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신부는 고골리에게, 그의 작품은 악마의 행위이며 문학자로서 살아나가는 한, 하느님의 구원이 없을 것이라는 것과 푸슈킨은 이교도의 죄인이니 절연하라는 것 등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민 끝에 거의 완성되었던 〈죽은 혼〉 제2부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금식에 들어가 의사의 치료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의사는 극도로 쇠약한 고골리의 몸에 억지로 방혈치료放血治療를 시도했는데, 효과를 보지 못해 1852년 2월 21일 아침 8시경 42세를 일기로 고골리는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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