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상상계

- 이십대 사르트르의 패기 넘치는 이미지론 이미지와 상상력에 관한 연구가 담긴 《상상계》는 상상의식을 "네다섯 가지의 의식의 위대한" 기능 중 하나로 되살려낸 중요한 책으로 평가된다. 서양철학사에서 상상력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시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져 왔고 심지어 정신을 혼란시키는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었다. 이미지를 사물이 아니라 '의식이며 행위' 쪽으로 정렬시키고 상상의식의 조건을 일반 의식의 조건과 동일한 것으로 추론해가는 사르트르의 논지는 상상력 연구에 있어 단연 선구적이고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가 이미지와 상상력에 관한 글을 완성한 것은 이십대 철학도 시절이었다. 《상상계》에는 청년 사르트르의 패기와 조심스러움이 동시에 엿보인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 철학계를 지배하던 후설과 베르그손의 사상을 원용하면서도 과감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모습에서는 훗날 사상의 대가로서의 자신감이 읽혀진다. 그런가 하면, 사르트르의 다른 저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심한 각주와 인용들은 논문이라는 형식을 지켜내려는 조심스러운 면모가 드러나기도 한다. - 현상학적 심리학으로 살펴본 상상력 사르트르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현상학적 심리학은 지향적 심리학이다. 사르트르는 후설의 현상학을 따라서 이론을 전개하고 "이미지의 지향적 구조"를 설명해낼 것을 제안한다. I부에서는 책 전체의 목표와 방법론을 제시하고, 이미지의 4가지 특성을 지적한 후, 이미지의 계보에 포함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찾아내어 각각의 이미지의 특징과 차이를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이미지 의식을 만들어내어 그것을 반성해보고 그대로 기술해 나가는 일이므로 "확실한 것"이라는 표제가 붙게 된다. II부는 실험심리학의 분석을 바탕으로 심적 이미지의 아날로공의 성질을 고찰한다. 심적 이미지에 관련된 지식, 정서, 운동, 말(언어)이라는 소재를 분석하여 이것들이 심적 이미지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가를 실험심리학의 사례를 통해 추측해낸다. 이것은 현상학적 기술과 달리, 실험심리학의 분석결과에 따른 추측이므로 "개연적인 것"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III부는 이미지가 심리적 삶에 나타나는 모습을 통해 이미지와 사유, 이미지와 지각의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우리가 왜 이미지화된 사유를 하는가, 즉 왜 상상의식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IV부에서는 상상적 세계에서 대면하게 되는 비실재적 대상의 특성을 다루고, 그 비실재적 대상을 마주한 여러 태도들을 통해 상상적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환각이나 강박관념 같은 정신 병리학적 현상뿐만 아니라, 정상인의 일상에 늘 나타나는 꿈까지도 비실재적 대상을 마주한 태도로 고찰하여 상상의식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결론에서는 상상의식의 근본적인 구조가 결국은 의식 일반의 구조와 동일한 것임을 밝혀내어, 모든 의식은 상상의식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예술작품의 구조를 상상의식에 견주어 분석하여 예술작품이란 하나의 비실재라는 확언에 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