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판’에서 푸코 읽기

박정수 · 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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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변혁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한 장애운동과 소수자운동의 눈으로 푸코를 읽는다. 왕성한 강연과 저작 활동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권력이론을 구성한 푸코는 ‘장애인’이나 ‘도착증자’처럼 ‘비정상인’ 범주를 만들어내며 작동하는 권력 장치들을 조명한 바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권력 장치들에 직접 결부된 장애인과 여성, 성소수자의 저항운동을 새로운 입각점으로 삼아 푸코의 저작과 삶 전반을 들여다본다.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서 취재를 해온 저자의 현장 경험은 물론,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권 활동가들이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장애 현실을 풍부하게 녹여내고자 했다. 이런 저항운동의 ‘무기’로 활용될 때, 푸코의 이론과 사상이 비로소 ‘담론적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오랜 기간 ‘장판’의 뜨거운 이슈였던 ‘장애등급제’, 즉 현재의 ‘종합조사표’가 장애를 계량화하며 장애인을 비인간화하는 방식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주목한 ‘근대 인간학’ 특유의 사유 체계와 맞닿아 있다. 근대에 들어 ‘노동’, ‘생명’, ‘언어’가 인간의 ‘본질’로서 탐구되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 본질을 결여한 인간으로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출현한 것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신의학 및 정신과 의사가 행사하는 과도한 권력도 탐구의 대상이다. 저자는 푸코의 작업을 참조하며 정신의학이 그 실질적인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행사한다고 꼬집는다. 푸코가 주목한 ‘안전사회’ 담론을 거쳐 발달장애인의 탈시설, 특수학교, 성년후견인 의제에 접근하는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발달장애인만을 위한 시설과 특수학교 설립 주장의 배후에는 누군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존재를 얼마든지 배제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논리가 깔려 있다. 《‘장판’에서 푸코 읽기》는 바로 그 ‘안전’과 ‘보호’라는 두꺼운 유리막을 거둬내고 장애인 당사자들의 삶을 사유해보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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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내며 ? 7 1장 인간학과 장애학, 그 말과 사물 ? 19 2장 광기의 역사와 정신의학의 권력 ? 71 3장 비정상인들을 위한 감시와 처벌 ? 117 4장 안전사회의 그림자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 165 5장 섹슈얼리티의 역사와 나르키소스들의 반란 ? 225 6장 자립생활을 위한 자기와 타자의 통치 ? 263 추천의 말 ? 292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지금 여기, 푸코를 읽기 가장 좋은 곳 ‘장판’(장애운동판)에서 건져 올린 푸코의 사유 이 시대 변혁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한 장애운동과 소수자운동의 눈으로 푸코를 읽는다. 왕성한 강연과 저작 활동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권력이론을 구성한 푸코는 ‘장애인’이나 ‘도착증자’처럼 ‘비정상인’ 범주를 만들어내며 작동하는 권력 장치들을 조명한 바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권력 장치들에 직접 결부된 장애인과 여성, 성소수자의 저항운동을 새로운 입각점으로 삼아 푸코의 저작과 삶 전반을 들여다본다.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서 취재를 해온 저자의 현장 경험은 물론,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권 활동가들이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장애 현실을 풍부하게 녹여내고자 했다. 이런 저항운동의 ‘무기’로 활용될 때, 푸코의 이론과 사상이 비로소 ‘담론적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오랜 기간 ‘장판’의 뜨거운 이슈였던 ‘장애등급제’, 즉 현재의 ‘종합조사표’가 장애를 계량화하며 장애인을 비인간화하는 방식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주목한 ‘근대 인간학’ 특유의 사유 체계와 맞닿아 있다. 근대에 들어 ‘노동’, ‘생명’, ‘언어’가 인간의 ‘본질’로서 탐구되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 본질을 결여한 인간으로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출현한 것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신의학 및 정신과 의사가 행사하는 과도한 권력도 탐구의 대상이다. 저자는 푸코의 작업을 참조하며 정신의학이 그 실질적인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행사한다고 꼬집는다. 푸코가 주목한 ‘안전사회’ 담론을 거쳐 발달장애인의 탈시설, 특수학교, 성년후견인 의제에 접근하는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발달장애인만을 위한 시설과 특수학교 설립은 사실상 장애인을 ‘정상에서 벗어난 특수 집단’으로 타자화하는 실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배후에는 누군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존재를 얼마든지 배제할 수 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성년후견인 제도도 마찬가지다. 악명 높은 금치산자 제도와 달리 온건한 법률 서비스를 자임하고 나선 이 흐름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안전 메커니즘에 기초한 이 세련된 인신 보호 역시 사실상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박탈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이라는 흥신소 이 책이 가장 면밀하게 검토하는 공간은 정신병원이다. 보통의 병원들과 다를 바 없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정작 지역 주민들도 알지 못하는 곳.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은 병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며, ‘밥 먹고 약 먹고 또다시 밥 먹고 약 먹고’를 반복하는 하루 일과를 보낸다. 문제는 정신병원의 장기 입원자 중 상당수가 치료 목적 외에 보호자의 요구나 열악한 주거 환경(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어) 등을 이유로 입원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신병원에는 환각, 망각, 조증, 자살충동 긴장성 발작 등 ‘양성 증상’ 때문에 입원한 이들보다 알콜의존증이나 행동장애,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한다. 매일같이 술에 절어 있고 이상한 소리를 질러대며 가족과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이들 말이다. 정신병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아주 편리한 ‘감옥’으로 기능한다. 정신병원이 없다면, 이런 골치 아픈 ‘비행자’들로부터 어떻게 가족과 이웃을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과적 증상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입원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얼마든지 ‘입원 조치’가 가능한데, 가족이나 경찰이 기소하고, 정신과 의사가 ‘반사회적 인격장애’ 혹은 ‘알콜의존증’으로 판결하면 재판 없이 곧바로 ‘구금’할 수 있다. 구금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보호자와 의사가 필요한 만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정신병원은 ‘정신질환을 치료한다’는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이러저러한 ‘비행자’들을 수감하는 감호소이자 가난한 지적장애인들의 거주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장애인 거주시설의 경우 그 수도 적고 주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정신병원은 도심에서 가깝고 많기에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도 한몫한다. 게다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정신질환자일 경우 정신병원은 더더욱 거부할 수 없는 선택지가 된다. 환자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 환자가 의료수급 대상자로 전환되어 가족들이 입원비 걱정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측도 정부로부터 의료 급여비를 지원받는다. 물론 정신병원에 치료 기능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실제 치료를 위해 그렇게나 많은 정신병원과 긴 입원 기간이 필요한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오늘날 정신의학이 자랑하는 강력한 치료 수단은 ‘약물’로, 성능 좋은 약물이 워낙 많이 개발된 탓에 약물 처방만으로도 웬만한 정신질환 양성 증상은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장기간 입원하지 않더라도, 집에서 생활하며 약을 타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정신과 의사, 그 ‘절대권력’의 실체 정신의학의 자가당착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치료 수단’으로 내세우고 있는 ‘장기 입원’이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정신과 의사들은 아예 정신병원이 ‘예비 범죄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곳’임을 당당하게 떠벌리기까지 한다. 이런 논리는 기이한데, 의사로서 ‘수용’의 일정한 치료 효과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을 그야말로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감금’을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이들의 역할에 의구심이 드는 지점이다. 이들은 의사인가, 아니면 판사나 교도소장인가? 실제로 정신과 의사가 정신장애인에게 행사하는 권력은 막대하다. 이는 다른 과 의사가 환자의 장애 정도를 판정할 때 행사하는 권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족이나 경찰의 기소에 대해 강제입원을 판결하는 것도, 정신병원 안에서 환자를 결박하거나 격리실에 감금하도록 결정할 수 있는 것도, 퇴원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것도 모두 정신과 의사이다. 정신과 의사의 이 절대권력을 떠받치는 토대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정식의학적 지식’일 테다. 정신과 의사가 정말로 그런 지식에 근거해 정신질환의 유무와 위험성을 판별하고 또 (정신병원 수용을 통해)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푸코는 그 누구보다 정신의학이 ‘광기’에 행사하는 권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의학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던 그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정신의학의 그 ‘불일치와 간극’의 역사를 면밀히 추적했다. 저자는 푸코의 분석을 따라가며 오늘날 정신의학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포착한다. ‘의학적 관점’이 아닌 ‘도덕적 관점’에서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고 ‘치료’라는 명분으로 수용시설에 감금시키는 이 흐름은 광기를 오로지 ‘이성’의 인식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강제로 수용한 17세기 근대의 정책, 그리고 그런 인식을 더욱 교묘하게 발전시킨 19세기의 정신의학과 닮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정신의학의 준거점인 19세기 정신의학은 사실상 17세기의 광기 분석과 차별화된 임상 분류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고, 정신병원 안에서 환자들을 구분할 때 그 기준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환자는 진단명이 아닌 규율체제에 따라 구분되었다. “얌전한 환자와 동요하는 환자, 순종적인 환자와 말을 듣지 않는 환자, 노동이 가능한 환자와 노동이 불가능한 환자, 벌을 받는 환자와 벌을 받지 않는 환자, 부단히 감시해야 하는 환자와 때때로 감시해야 하거나 감시할 필요가 없는 환자를 구분하는 원리가 실제로 정신병원을 지배한다.” ‘프로작’(항우울제) 같이 제약회사가 개발한 각종 약물이 대중화된 오늘날 정신의학의 기만성은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약물 치료의 효과가 커질수록 정신병원 입원 기간과 정신과 의사의 개입 비중은 현저히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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