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생을 조각한다”
파리지앵 목수정 작가가 프랑스어 34개로 펼치는 ‘말들의 풍경’
언어에 아로새겨진 ‘홀로 그리고 함께’의 프랑스적 일상과 문화
20년간 파리지앵으로 살며 한국과 프랑스의 경계에서 글을 써온 목수정 작가. 그간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아무도 무릎 꿇지 않은 밤》 《파리의 생활 좌파들》 등에서 프랑스 사회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세밀하게 묘사한, 자유·평등·박애의 가치에 닻을 내리고 한국과 다른 논리로 굴러가는 프랑스 사회와 일상은 거울처럼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왔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두드렸던 프랑스어 34개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파리에서 만난 말들》로 독자 곁에 찾아왔다. 작가는 왜 ‘말’에 주목했을까? 그는 “말은 각각의 공동체가 경험과 성찰을 통해 빚어낸 열매”로, 그 씨 속에는 공동체의 응집된 지혜와 경험,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일상을 풍요롭게 살아가게 하는 태도부터 ‘혁명의 나라’를 이끌어온 끈끈한 공동체 정신까지, 프랑스어 34개가 펼치는 ‘말들의 풍경’을 통해 프랑스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작가가 말을 통해 발견한 프랑스적 가치의 중심에는 ‘홀로 그리고 함께’ 정신이 있다. 68혁명을 거치며 과거 거대 이데올로기가 보듬지 못했던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터져 나왔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단단한 개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개인을 중시하는 태도는 프랑스인들이 자주 말하는 envie(앙비: 욕망)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프랑스인들은 개인의 ‘앙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데, 관습·예절·상식보다 개인의 욕망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테면 ‘앙비가 없다’는 말은 모든 권유를 차단하는 프랑스식 표현이다. 반면 ‘앙비가 있다’고 말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말려서도, 말릴 수도 없는 의지를 품었다고 여긴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과 타인의 욕망을 표현하며 존중하는데, 저자는 이를 ‘사소하고 경이로운 프랑스식 사치’로 명명한다.
이렇듯 개인주의에 단단히 뿌리 내렸지만, 1789년 시민혁명의 후손답게 모두의 권리를 위해 연대할 때는 너나없이 발 벗고 나선다. 이를테면 책에서 언급하는 ‘greve generale(그레브 제네랄: 총파업)’은 1936년 첫 유급휴가 시대를 연 이래 프랑스 공동체를 굳건히 지켜왔던 말이다. 총파업이 시작되면, greve generale에서 g를 뺀 reve generale, 우리말로 ‘모두의 꿈’이란 말이 거리 곳곳에 포스터로 나부낀다. ‘총파업’을 ‘모두의 꿈’으로 바꿔놓는 프랑스식 농담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끈끈한 사회적 유산이다. 이외에도 좌우파 상관없이 자주 쓰는 단어 solidarite(솔리다리테: 연대)에서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프랑스 정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개인주의를 고수하면서도 필요할 때 함께 뭉치는 프랑스적 삶의 태도는 일견 서로 상충하는 듯하면서도, 개인과 공동체를 모두 존중하는 그들만의 지혜이기도 하다.
“세상의 어떤 말들은 여러 해 공을 들여 품고 있어야
비로소 만나고, 친해지고, 내 것이 된다”
각박해져만 가는 일상을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말들
‘견디는 생존’을 넘어 ‘누리는 삶’을 추구하는 프랑스 정신을 만난다
《파리에서 만난 말들》은 총 3부로, 1부 〈달콤한 인생을 주문하는 말〉, 2부 〈생각을 조각하는 말〉, 3부 〈풍요로운 공동체를 견인하는 말〉로 구성되었다.
1부 〈달콤한 인생을 주문하는 말〉에서는 ‘견디는’ 생존(survivre, 쉬르비브르)을 넘어 ‘누리는’ 삶(vivre, 살다)을 추구하는 프랑스인들의 일상을 프랑스어 14개를 통해 들여다본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와는 반대로 프랑스에선 doucement(두스망: 부드럽게)이란 단어를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며 ‘천천히, 부드럽게’ 살아가는 태도를 지향한다. 태어날 때부터 이 말의 세례를 받고 자랐기에 그들은 “5분 늦을지언정 뛰지 않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서른 해 동안 한국에 살면서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그가, 파리로 이주해 두스망 문화에 젖어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Apero(아페로: 식전주)-일상의 천국을 여는 세 음절〉 장에서는 프랑스의 아페로 문화를 깊이 살핀다. 아페로는 흔히 ‘식전주’로 해석되는데, 아페로를 규정하는 주요 요소는 술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것을 마시는 시간의 흥겨움·즉흥성·가벼움이다. 너그럽게 여유를 부리며 함께 농담을 즐기는 아페로 시간으로 프랑스인들은 하루 동안 쌓인 긴장을 이완한다. 저자는 “아페로를 즐기는 순간, 우린 살아가려 애쓰는 처절한 생존 기계가 아니라, 삶을 즐기는 유쾌한 존재들이란 사실을 서로에게 일깨운다”라고 말한다. 아페로에 곁들여지는 안주 사전이 나올 만큼 프랑스인들은 아페로에 각별하고, 이는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찬미하는 프랑스적 감각을 나타내는 말도 있다. 바로 ‘Il fait beau(일 페 보: 아름다운 날씨로군요)’. 프랑스인들은 형용사 beau(보: 아름답다)를 일상에서 경탄을 느낀 대상을 향해 아낌없이 표현한다. 잘 차려진 음식을 보고 “맛있겠다”가 아니라 “아름답다”를 연발하고, 축구 중계 중에 적시에 터진 멋있는 골에 대해 캐스터들은 “C’etait vraiment beau(이건 정말 아름다운 골입니다)”라고 탄성을 내지른다. 삶의 마디마다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그들의 습관은 프랑스 사회의 발달한 미의식의 바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외에도 scrupule(스크뤼퓔: 세심함), bonjour(봉주르: 안녕하세요) 등 일상을 더욱 달콤하고 부드럽게 풀어주는 단어들로 프랑스적 일상의 다양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2부 〈생각을 조각하는 말〉에서는 프랑스어 11개를 다루면서 ‘공화국’을 완성한 프랑스적 가치와,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정치적 차이에 대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먼저 〈laicite(라이시테: 정교분리 원칙)-공화국을 완성한 네 번째 가치〉 장에서는 오늘날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인 ‘정교분리 원칙’을 탐구한다. 1905년의 ‘정교분리법’이 의회에서 어떻게 통과됐는지,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건’이었는지 알려주면서 정교분리 원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오늘날 프랑스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위협받고 있는지를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생생히 증언한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사문화된 이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지 종교에 대한 원칙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과 신념에 어떻게 연결되는지까지 고찰한다.
transgenerationnel(트랑스제네라시오넬: 세대를 가로지르는)이란 단어에 얽힌 이야기도 인상 깊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심리적 연결성, 조상의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전해 내려오는 현상에 관심이 높다. 이는 흡사 조상들과의 인연을 “칭칭 쟁이고” 사는 한국 사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한국에서는 굿을 해서 조상 등의 영혼을 달래듯이, 프랑스인들은 기 치료사 등을 통해 먼 조상의 트라우마를 인지하고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계심리학’을 통해 가족 내 숨겨져 있던 비사祕事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며 화해해 매듭을 풀고자 애쓰기도 한다.
일명 ‘드라마 왕국’인 한국 사회를 향한 표현도 눈에 띈다. 바로 ‘vie par procuration(비 파르 프로퀴라시옹: 대리 인생)’. 이 말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왜 늘 복수극이 나오는지 질문받은 저자가, 한국에서는 법이나 사회적 정의가 드물게 작동하고 개인적 응징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드라마가 그 역할을 대신해준다고 답하자 상대에게 들은 말이다. 한국인들이 드라마를 통해 ‘대리 인생’을 산다는 것. 같은 맥락에서 한국 드라마에 재벌이 많이 나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