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후
박노해 시인의 12년만의 신작시집
가슴에 벼락 같이 꽂히는 한 줄의 시詩를 만난 적이 있는가. 내 안의 나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 어둑한 앞길을 비춰주는 빛과 같은 문장을. 때로 그 한 줄에 기대어 힘겨운 날들을 버텨내고,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그런 시를. 상처 난 우리 가슴은 간절히 시를 부르고 있다. 세상의 분노와 혐오에 휩쓸릴 때, 하루하루 내 영혼을 잃어갈 때, 이 세계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무력하기만 할 때. 바로 그때, 박노해의 시를 꺼내 들어야 하는 순간이다.
수많은 독자들의 “인생 시집”이 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후 12년 만에 박노해 시인의 신작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가 출간된다. 3천여 편의 육필 원고 가운데 301편을 묶어 펴낸 이번 시집에는 그동안 입에서 입으로 낭송되고 사랑받은 시들, 그러나 책으로는 처음 출간되는 「너의 하늘을 보아」, 「별은 너에게로」, 「살아서 돌아온 자」, 「경계」, 「이별은 차마 못했네」, 「동그란 길로 가다」 등의 시도 함께 담겨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하늘이 있다.” 밤하늘의 북두칠성처럼 언제나 나의 길을 밝혀줄 301편의 시를 건네며 박노해 시인은 말한다. 자신의 삶이 빚어낸 이 시들은 이제 그대의 시이자 우리의 시라고. “나의 시는 어둠과 눈물 속에서 암시暗示받은 암시暗詩일 뿐, 이 시는 그대의 것이다. 그대가 말하라.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삶으로, 자신이 싸워낸 진실로.”
시인이자 혁명가이며 유랑자로 살아온 인생
젊은 날의 약속이 있어,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저주받은 시인이고 / 실패한 혁명가이며 / 추방당한 유랑자”(「취한 밤의 독백」) 박노해. 그는 가난한 청년 노동자 시절을 지나, 민주화 운동으로 사형 구형과 무기징역 감옥살이, 석방 후에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새로운 혁명의 길을 걸어왔다. 그의 길은 어둠이었으나 그는 언제나 ‘빛을 찾아가는 여정’에 자신을 두었다.
『노동의 새벽』(1984)을 썼던 27살의 ‘얼굴 없는 시인’은 이제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려앉은 70을 바라보는 성상星霜이 되었다. 그럼에도 『너의 하늘을 보아』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온 ‘푸른 마음’의 소년을 마주하는 것 같다. 박노해 시인은 “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고 말한다. “널 지켜줄게 / 그 말 한 마디 지키느라 / 크게 다치고 말았다 / 비틀거리며 걸어온 내 인생 // 세월이 흐르고서 나는 안다 / 젊은 날의 무모한 약속, / 그 순정한 사랑의 언약이 / 날 지켜주었음을”(「그 약속이 나를 지켰다」). 변함없는 ‘첫마음의 길’을 걸어온 그의 힘은 바로 그 ‘약속’이었다.
『너의 하늘을 보아』에는 “오직 나 자신만이 증인”인 그의 삶과 사랑, 투쟁과 상처의 고백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이 푸른빛의 시집은 잊고 있던 ‘내 안의 소년 소녀’를 일깨운다. 선함과 사랑의 길로 손내민다. “자신 안에 자리한 악의 능력을 /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자가 있다 // 자신 안에 커오는 선의 능력을 / 쉬임 없이 고무시키는 자가 있다 // (…) 아무리 무력한 듯해도 선한 사람은 / 선한 존재 자체로 내뿜는 영향력이 있으니”(「선한 영향력이 있으니」).
삶과 죽음, 청춘과 사랑, 아이와 노년, 관계와 휴식,
인생의 모든 순간이 담긴 한 권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는 528쪽의 두께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한 사람이 쓴 시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목소리가 울려온다. 탄생과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굵직한 순간 사이로 아이와 부모, 교육과 배움, 연애와 이별, 청춘과 노년, 정원과 농사, 독서와 여행, 고독과 관계 등 삶의 모든 순간이 이 한 권의 시집에 담겨있다. 평범하다 여겼던 일상이 순간 비범한 행위로 비약하고, 이렇게 풍요로운 의미로 빚어질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내 영혼을 맑게 하는 시, 인생의 고비마다 꺼내 읽고 인용하고 싶은 시가 가득하다.
특히 이 땅의 청춘에게 보내는 애정과 격려의 시편들이 많다. 흔한 ‘위로’가 아닌 정신이 번쩍 나는 ‘직언’을 건넨다. “젊음은, 조심하라 // 젊은 너의 마음을 얻으려 / 온갖 위로와 재미를 바치며 / 화려한 유행의 분방함으로 / 고귀한 젊음을 탕진케 하리니”(「젊음은, 조심하라」). “고통에도 습관의 수준이 있어 / 그러니까, 고통을 견뎌내는 / 자기 한계선을 높여 놓아야 해 // (…) 고통받을 그 무엇도 하지 않으면 / 그 무엇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 테니까”(「못 견딜 고통은 없어」). 젊음을 위로하고 젊음에 편승하는 시대, 박노해 시인은 뜨거운 믿음으로 말한다. “청년을 위한다며 동정하고 위로하는 건 / 청년에 대한 최고의 모독이다 / 젊음은 젊음 그 자체로 힘이다 // (…) 젊음은 위로가 아닌 활로가 필요하다”(「젊음에 대한 모독」). 어쩌면 아프고 불편하기까지 한 박노해의 시는, 바로 그렇기에 우리 영혼을 강인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인식의 전복
‘시를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박노해 시인의 시는 사건과 사물, 세상과 자신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무심한 돌 하나에서도, 풀꽃과 나무, 책과 만년필에서도 그 존재의 전혀 다른 빛을 비춰낸다. 그의 통찰과 성찰, 상식을 전복하는 관점은 기존의 세계관을 번쩍 확장시키고, 그 시를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강렬한 체험과 감동을 선사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은 // 사랑받기보다 / 사랑을 하기 / 사랑이 되기”(「사랑이 되기」). “내 손바닥에 세상을 놓고 / 스마트폰을 갖고 놀다 보니 / 스마트폰이 나를 갖고 논다 // 편리가 나를 갖고 논다 / 검색이 나를 갖고 논다 / 재미가 나를 갖고 논다 // (…) 아무래도 크게 걸려든 것 같다”(「나를 갖고 논다」). “인생이 길어졌다 / 아니 / 수명이 길어졌다 // 시간이 짧아 초조하다 / 시간이 길어 불안하다 / 인생은 짧고, 노년은 길다 // 삶이 이리 길 줄 알았더라면, / (…) 다르게 배우고 다르게 일하고 / 다르게 살아왔을 텐데”(「가혹한 노년」).
전대미문의 사태였던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서도 그는 말한다. “하얀 천에 씌워진 인간의 봄날에 / 벚꽃 날리는 시대의 상여喪輿 길에 /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애도하듯 / 최후의 게릴라처럼 홀로 걷는다 // 문득 죽음 같은 고요가 밀려온다 / 하이얀 얼굴들의 차가운 공기가 / 거리마다 혁명 없는 잔싸움이 / 병적인 우울과 무력한 일상이 // (…) 다 죽은 듯 황량하던 대지에 / 얼음 속의 꽃씨 하나처럼 / 견디고 지키고 은신한 그대가 / 여기요, 나 살아있어요, / 거기 누구 살아있나요, / 꽃눈처럼 떨림으로 부르는 소리 // (…) 그렇게 다시 봄이 오고 / 그렇게 다시 빛이 오고”(「하얀 봄날에」). 그의 예리한 정신의 시어들은 시대 모순의 급소를 찌르면서도,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바치는 한 송이 들꽃 같은 깊은 서정을 담고 있다.
맑은 눈물로 마음이 씻기며
더 크고 고귀한 존재가 되는 ‘시의 체험’
박노해 시인의 시는 쉽다. 난해한 의미를 해석하느라 복잡하게 머리를 맴돌지 않고 바로 가슴으로 꽂히는 시이다. 기교와 장식 없이 시퍼렇게 벼린 시어들은 단순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리듬감에 흡입력이 있어, 마침표 한 번 찍지 않고 끝까지 휘몰아치며 빠져들게 한다. 내면의 심연에서 우주의 대서사시까지, 그 시의 공간과 시간 속으로 단숨에 이끌며 시를 읽는 순간 그것을 ‘체험’시켜 버린다. 박노해의 시는 생생히 살아있다. 눈물이 터지는 시, 웃음이 나오는 시, 가슴에 불을 붙이는 시, 고요히 잠겨드는 시, 그렇게 시를 읽는 동안 제대로 웃고 제대로 울면서 ‘내 안에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