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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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소진시킴으로써만 자신을 표현하는 ‘비누’에 대한 사물의 시인 프랑시스 퐁주의 집요한 천착 읻다 시인선 11권. ‘사물의 시인’으로 알려진 프랑시스 퐁주가 조약돌, 빵, 오렌지나 달팽이와 같은 평범한 ‘사물’을 소재로 오랜 시간 집요하게 관찰하고 묘사하여 완성한 산문시의 모음이 《사물의 편》(1942/2019)이었다면, 《비누》는 비누라는 하나의 사물에만 집중하며 탐구한 퐁주의 작업 노트가 그대로 한 편의 작품이 된 책이다. 이 책은 1942년 4월 작성한 한 장의 메모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비누에 관한 글은 25년 동안 서류철 안에 쌓여만 갔고, 1967년 갈리마르에서 마침내 책으로 출간되었다. 프랑시스 퐁주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비누》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25년간 반복하고 변주하는 텍스트 한 권의 책이 된 《비누》 비누를 집요하게 관찰하기 전, 퐁주는 1941년에 쓴 〈루아르 강둑〉에서 시 쓰기에 대한 자신을 드러낸다. 나의 작업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위해 내 표현의 지속적인 교정 작업이길 바란다(이러한 표현의 형식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 〈루아르 강둑〉, 1941년 5월 24일, 로안 실제로 시간에 따른 작업에 거의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그 관찰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비누》는 퐁주가 스스로 밝힌 경향성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언어의 남용과 실험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지적 세척’, 즉 우리 정신의 때를 벗겨줄 ― 수다스럽지만 품위 있고, 무기력하지만 민첩하며, 손에 쥐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 좋아지는 ― 비누가 되어줄 것이다. 비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바로 그가 기진맥진할 때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신에 대해 말한 모든 것. - 《비누》 25쪽 돌의 일종, 하지만 자연의 힘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주무르게 하지는 않는 돌. 이것은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눈앞에서 녹는다. - 27쪽 퐁주는 첫 시집 《사물의 편》의 마지막 시 〈조약돌Le galet〉에서 자신의 세계 해석 혹은 우주 발생론을 담아낸다. 이 시의 마지막은 조약돌과 물의 대비를 보여주는데, 곧 이어진 작업 《비누》에서는 물과 상호 작용하는 대상인 비누에 천착한다. 외형적으로는 자그마한 돌과 다름없지만 비누의 ‘이마’는 햇빛에 마르고, 굳어지고, 갈라진다. 근심으로 얼굴이 어두워지고 금이 가더라도 비누는 그렇게 잊힌 채로 비활성 상태에 있어야만 가장 잘 보존된다. 그러다 물을 만나면 비누는 민첩해지고 달변이 된다. 비누는 물과 물리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작’한다. 이때 발생하는 비눗방울은 비누의 침과 격정이며, 곧 비누의 말이다. 수십 년에 걸쳐 비누를 응시하고, 만지고, 방치하고, 함께 비비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인의 말 또한 비누 거품처럼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부풀어 올랐다가 되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프랑시스 퐁주는 강연용 원고를 더하거나 희곡으로 설명을 대신하기도 한다. 또한 시각적 텍스트, 일기와 함께 부록에 실린 프로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비누에 대한 수사를 시도한다. 여러 장르로의 언어적 실험 사물의 특성에 부합하는 글쓰기 "단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도 천 가지 필연적 특성의 구성이 가능하다.“ - 〈베르나르 그뢰튀젠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비누의 수다를 능가하기 위해 시인은 동원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비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비누가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면서까지 말하고자 한 것을 시인은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옮긴이 해제 중에서 퐁주는 사물의 특성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수사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비누를 가장 적합하게 표현하며 비누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양식은 차이를 갖는 반복을 되풀이하는 ‘푸가적 글쓰기’이다. 사물에 대한 표현에 있어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말을 연습하는 행위는 언어에 균열을 내고, 언어를 남용하는 일을 수반한다. 이러한 과정은 “침묵하는 것도, 기존의 언어를 관례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며 “가능한 한 많이 말하는 것, 그것도 새로운 방식으로 많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옮긴이 해제) 《비누》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실험과 함께 단어의 발음이나 어원 등을 활용해 낯선 조어로 의미와 형태를 동시에 드러내는 시도 또한 만날 수 있다. 《비누》의 교훈 : 지적 세척과 대상기쁨objoie "당신은 내게 언젠가 말하길 비누savon라는 말은 '앎savoir'이라는 말과 멀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당신이 제안한 지적 세척은 비누를 앎과 소통하게 합니 다. 실제로 옛 지식을 씻고, 때 빼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텍스트의 기능에 접근하고자 할 때 우리가 늘 충돌하는 것이 이 옛 지식이죠.“ - 《프랑시스 퐁주와 필립 솔레르스의 대담집》 중에서 비누와의 만남과 모험을 시작하며, 퐁주는 비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다양한 방식으로 말하고 우리 눈앞에서 거품을 만들어 보여주고자 한다. 거품 만들기 연습은 말을 이리저리 연습해보는 행위와 유사하다. 순수함은 침묵이나 자살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말의 연습으로 얻을 수 있다. 이 연습을 통해 우리의 정신은 깨끗해진다. 이것을 퐁주는 ‘지적 세척’이라 부른다. 시인은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변주를 되풀이하면서 우리에게 친숙하고 살을 맞닿아 느끼는 사물인 비누를 통해, 추상적인 세계로 향하려는 지적 경향을 씻어내는 하나의 침례 의식을 유비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적인 지적 세척은 타자를 대하는 독자의 정신에 대한 환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이런 세척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비누》를 따라 읽는 일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비누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것, 비누가 다른 것(존재 혹은 사물)과, 결국 다른 대상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동행 덕분에 누구라도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정체성을 비본질적인 자기로부터 떼어낼 수 있으며, 정체성의 때를 제거할 수 있고, 정체성의 그을음을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를 의미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대상기쁨 속에서 자기를 영원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들의 천국은, 요컨대, 타인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 이 책의 낙원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독자여, 여러분의 독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겠는가? (여러분의 독서는 이 마지막 줄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 - 〈부록 5, 손 비비기. - 뭔가로. - 쓰기와 읽기. - 대상기쁨의 도덕 입문. - 책의 끝.〉, 253-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