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마리톄
동프로이센은 1차대전이 끝나고 독일 본토와 떨어진 섬 같은 월경지였다가 2차대전이 끝나고는 사라졌다. 승전국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을 점령하고 그곳에 살던 독일인을 추방하거나 죽음으로 내몰았다.
피아노와 난로가 있던 따뜻한 집은 러시아 사람들이 들어왔고, 가족들은 땔감 창고로 ㅤㅉㅗㅈ겨났다. 추운 겨울이 닥쳤고 먹을 것이라곤 러시아 군인들이 버리는 음식 쓰레기와 감자 껍질이 전부였다.
아빠는 전쟁터에 끌려갔고, 할아버지는 빼앗긴 집을 되찾기 위해 군인을 만나러 간 뒤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집에는 여자와 아이들만 남았다.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마르타 아줌마는 군인들에게 당해서 죽었다. 오빠 헤인트는 먹을 것을 구하러 리투아니아로 떠났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언니들도 집을 나갔다. 레나테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엄마도 고모도 동생들도 모두 없어졌다.
레나테는 혼자가 되었다. 살기 위해 걷고 또 걸으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밤은 춥다. 길을 잃은 이가 숨을 곳을 찾았다 하더라도, 어린아이의 몸은 시리고 다리는 나무처럼 얼어붙는다.
어린 소녀가, 그것도 혼자서 견디기엔 너무나 참혹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다. 독일 아이들은 눈에 띄면 무조건 잡아가고, 독일인을 도와준 사람도 유형지로 보내 버리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레나테는 자기의 독일 이름을 버리고 리투아니아 소녀가 되어야 했다.
“내 이름은 마리톄예요.”
〈더 타임스〉가 뽑은 최고의 새로운 역사 소설
“역사 속에서 잊힌 비극을 흔들림 없이 묘사하는 이 소설을 잊을 수가 없다.”
2019년 〈더 타임스〉는 그해 최고의 역사 소설로 이 책을 꼽았다.
역사 속에서 잊혀 지금은 독일 사람들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늑대의 아이들’은 어떻게 책으로 나와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게 되었을까.
책을 쓰고 나서 알비다스 슐레피카스는 “이 책 스스로가 나를 선택한 것 같다”고 했다.
홀린 듯이 책을 쓰게 한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참혹하고 슬픈 역사를 우리가 읽고 기억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는 것은, 기억하는 것은 힘이 세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전쟁 속에서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지.
어떠한 전쟁에서든 정치나 권력이 아니라, 인간이 승자였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지.
그 기억의 연대야말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전쟁을 멈추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
작가는 1996년 처음 ‘늑대의 아이들’ 이야기를 들은 뒤 수많은 레나테들을 만나고, 역사적 자료를 조사했다 한다. 그리고 2011년 책이 나왔다. 15년의 세월을 익혀 태어난 소설이다.
작가가 시인이어서 그런지, 소설은 시처럼 읽힌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생생하고 깊다.
참혹함 때문에 외면하고 싶었던 그 일을 마주할 수 있게 한 문학의 힘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