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사는 것이 너무 지겹다고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SF 소설가 천선란, 참된 일기 인간 윤혜은, 취미 부자 편집자 윤소진
어쨌거나 글 쓰는 세 여자의 ‘일기’로 수다 ‘떨기’
화제의 팟캐스트 〈일기떨기〉 산문집 첫 출간!
《천 개의 파랑》《나인》《노랜드》《이끼숲》 등 하나의 존재 속에 담긴 우주와 회복의 서사를 경이로운 통찰과 상상으로 구현해내는 SF 소설가 천선란,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아무튼, 아이돌》을 통해 한 해의 플레이리스트만 1700곡에 달하는 아이돌 덕후이자 십수 년 차 참된 일기 인간의 면모를 보여준 에세이스트 윤혜은, 주짓수부터 제과제빵, 점심시간에 하는 요가까지 다부진 취미 부자 편집자 윤소진. ‘글’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취향, 성격, 일상 등 모조리 제각각인 세 사람이 서로의 글(일기)을 읽고 생각을 논하는(수다) 화제의 팟캐스트 〈일기떨기〉가 책으로 출간된다.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는 2021년 가을에 출발한 〈일기떨기〉의 회차 중 보다 깊이 나누고픈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나와 인생’‘우리와 관계’‘취미와 취향’에 관해 묶고, 팟캐스트에서는 풀지 못한 내용을 전면 다듬고 덧붙여 새로운 대담으로 녹여냈다. 누군가에겐 찬란할 이십 대의 날들이 실은 최악이었다는 천선란 작가의 삶, 직장인에서 프리랜서로, 프리랜서에서 소상공인으로 갈라지는 생의 복판에서 고투하는 윤혜은 작가의 하루, 따끈따끈 노릇하게 구워지는 빵을 바라보며 책 만드는 일의 희로애락에 울고 웃는 윤소진 작가의 시간까지, 진득한 산문 뒤로 이어지는 세 사람의 대화에는 그간 어디에서도 쉽게 꺼내놓지 않았던 진심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천선란 소설가에게 영감을 준 사건들이나 어릴 적 교환일기가 생각나는 우정의 면면, 방송된 일화의 말 못 할 비하인드 등 활자로 꾹꾹 눌러 새겼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기록들은 단권으로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가치가 있다. 더욱이 좋아하는 작가의‘일기를 훔쳐보고 수다를 엿듣는’ 짜릿함은 단연한 재미일 수밖에.
김신지 작가의 추천사처럼 “누군가의 일기를 읽어버린 뒤에 그 사람을 친밀하게 느끼지 않는 법”을 우리는 모른다. “남의 고유한 분투를 지켜보는 게 어째서 지금의 내 삶에 대한 응원이 되는” 건지도. 때론 고되고 서글퍼도 결국에는 유쾌하고 상큼하게 마감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 무심했던 나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가고 싶어진다. 이 시간을 오롯하게 담아 뜻밖에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다 마음이 문제지, 마음이 가장 어려운 일이니까”
살다 보면 쓰고 싶고, 쓰다 보면 말하고 싶어지는
잘 쓰인 마음들과 다정다감 위로의 대화들
대학 선후배로 모인 세 사람의 인연에는 문예창작학을 전공하였지만 그 과정이 녹록잖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좀체 적응 못 하고 학기 중 가족 몰래 예고에 편입한 천선란, 학창시절 내 해온 음악을 포기하고 글 쓰는 대학에 입학한 윤혜은,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본 예고 실기에 덜컥 합격해버린 윤소진.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는 3부에 걸쳐 그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글쓰기’의 운명적인 시작과 그 후일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친다.
1부에는 누구 하나 좋다는 사람 없이 후회막심인 이십 대를 뒤로하고 이젠 “지나치게 하나의 나에게 집중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으로 무장한, 막 삼십 대에 접어든 세 사람의 인생관이, 2부에는 결혼에 관심 없는 세 사람의 결혼식 로망이라거나, 만남과 이별, 모녀의 이야기 등 관계에 관한 꾸밈없는 고백이 녹아 있다. 3부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는 소설가, 음악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 없는 에세이스트, 무언가를 좋아하고 시작하기에 망설임 없는 편집자가 밝힌 지금의 삶을 더 세세히, 가치 있게 돌보는 방법이 담겼다.
솔직하게 쓰다 보니 넘치는 말이 많아져서일까. “유재석의 〈핑계고〉보다 우리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세 사람이 서로의 일기를 핑계 삼아 시작해온 대담은 책에‘일기떨기’라는 별면으로 실려 있다. “수다스러운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이라는 〈일기떨기〉 애청자들의 말처럼,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의 다정한 대담들은 우리를 책장 앞에 앉힌다. “누군가 내 일상에 침투해 말씩이나 더해주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런 순간만큼은 삶을 협업하는 느낌과 더불어 다른 이의 사연과 말이 건네는 위안을 만끽해봐도 좋지 않을까.
엄마의 간병일기를 쓰는 내가 너무 징그럽게 느껴졌어요. 이렇게까지 써야 돼? 이건 정말 오로지 날 위한 걸 텐데……. 모든 글의 주인공은 아픈 엄마이기보다 사실 나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나를 위해 엄마를 전시하는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쓰고 나면 어쨌든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거예요.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일단 쓰기 시작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쓰기가 나를 구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_〈내 삶의 뜨거운 순간〉(일기떨기), 178쪽
“요즘 나는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매일 한두 개의 후회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향한
내일은 ‘꼭’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진솔한 다짐
연말이 다가오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하루가 지나가고, 실수투성이인 것 같아도 마무리되는 일들을 바라보며 문득 “언덕에서 빠르게 굴러가는 빈 깡통”처럼 이 삶을 얼렁뚱땅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오늘도 버텨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게 되기도 한다.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에 나오는 삶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매일 왕복 세 시간 거리를 출퇴근하는 직장인의 삶, 새벽까지 원고를 쓰면서도 일 없을 때를 대비해야 하는 프리랜서의 삶, 늙어가는 부모님의 노후를 걱정하는 자식의 삶 등. 그 때 묻은 생활감에도 이 책의 이야기가 값진 이유라면 그들의 일기에 등장하는 ‘내일’ 혹은 ‘언젠가는’ 꼭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 덕분일 테다. 일기의 본질이 그러하듯 내일을 향한 다짐이 지켜질지는 미지수이지만 그 또한 크게 중요치 않을 것이다. 책에 나온 다짐들은 거창한 계획보단 한심하게 여기며 불화했던 나와 화해하고 싶다는 스스로를 향한 위로에 가까우므로.
작업실을 나오던 날, 우리는 바로 앞에 있던 인생 네 컷 부스에서 사진을 찍고 그 뒷면에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2년 동안 우리가 글을 포기하지 않았음에,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큰 버팀목이 되었음에, 그리고 계속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내용이었고, 우리는 2년 동안 지겹게 걷던 길을 마지막으로 또 지겹게 걸으며,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_〈선란 일기〉, 145쪽
천선란 소설가는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를 펴내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썼다.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대화를,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하루의 기록을 오래도록 나누고” 싶다고. 세상에 엉망이기만 한 삶은 없다. 모두가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니까. 매일 몇 개의 후회를 안고 집으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 앞에서 그저 ‘할머니가 되고 싶다’라는 맹랑한 꿈을 떠올려보자.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동력 삼아 내일은 ‘꼭’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가뿐히 잠에 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