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 년 전부터 유럽으로 넘어간 세계사의 패권과 중심축은
다시 아시아로 넘어올 것인가?
700만 년의 인류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글로벌리제이션’
이 책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의 저자이자 권위 있는 경제사학자인 다마키 도시아키는 700만 년의 인류사를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핵심어로 정리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총 세 번의 ‘글로벌리제이션’을 경험했다. 제1차 글로벌리제이션은 160만 년 전~25만 년 전 기간 호모에렉투스가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나간 사건이다. 제2차 글로벌리제이션은 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대륙을 나와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간 일이다. 그리고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은 15세기에 시작된 대항해 시대로, 유럽인들은 배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원정을 다니며 막강한 힘과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저자는 이 세 차례의 글로벌리제이션 중 특별히 ‘제2차’와 ‘제3차’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이 두 차례의 글로벌리제이션에 ‘세계사의 중심축’이 형성되고 작동해온 주요한 맥락과 크고 작은 집단과 민족, 국가의 거대한 부와 권력이 만들어지고 이동해온 과정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 태동한 이후 수천 년간 세계사의 중심축은 ‘중국 문명’에 있었다
제2차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인류는 세계 각지로 이주해 정착 생활을 했다. 그 과정에 처음으로 농경 생활을 시작했으며 ‘6대 문명’을 탄생시켰다. 6대 문명이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그리고 양자강 문명과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말한다. 6대 문명 중에서 최초로 경제 성장에 성공한 문명은 ‘황하 문명’이다. 황하 문명은 양자강 유역에서 일어난 문명을 포괄한 ‘중국 문명’으로 변모했고, 세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문명을 이루었다. 이는 경제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 6대 문명 중 양자강 문명을 아우른 황하 문명, 즉 중국 문명이 패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중국 문명의 패권은 놀랍게도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5세기 무렵까지 수천 년간 이어졌다.
‘세계사의 중심축’과 경제 패권에 관한 3가지 핵심적인 질문
이 책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에서 저자는 3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경제사학자’로서 자신의 전문지식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탁월한 관점과 해답을 제시한다. 3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황하 문명, 혹은 양자강 문명을 아우른 중국 문명은 어떻게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했으며 수천 년간이나 경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2. 오랜 세월 중국 문명, 혹은 아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경제적 패권과 세계사의 중심축은 15세기 이후 왜 유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3.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세계사의 중심축과 경제 패권은 어떻게 이동해왔으며 향후 어떻게 이동해갈 것인가? 그리고 세계사의 중심축은 다시 아시아로 넘어올 것인가?
중국 문명은 어떻게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경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먼저, 첫 번째 질문에 관한 저자의 관점을 살펴보자. 중국 문명이 수천 년간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경제 패권을 장악한 데 반해 다른 주요 문명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데에는 ‘통일성’과 ‘집중력’의 차이가 있다.
6대 문명 중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성립 시기도 한참 늦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어 다른 문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메이저 문명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오리엔트’라는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했으며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으나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오리엔트에서는 수많은 국가가 난립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아 통일 국가가 생겼다 멸망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힘이 분산되었고 지리적 약점도 안고 있어 세계 경제 패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인더스 문명도 비슷한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쳐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으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반면 황하 유역에서는 일찍부터 통일 국가가 완성되어 전란의 시기에도 국가 통일이 당연한 전제로 여겨졌다. 황하 유역의 통일 왕조는 중국 경제라는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도맡았다. 근세, 혹은 근대에 들어 유럽의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이 등장하여 국가 주도로 비약적 성장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패권을 장악했는데, 놀랍게도 중국에서는 이미 2천 년도 훨씬 더 전에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셈이었다.
중국 문명 또한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혼란과 분열의 시기를 겪었는데 춘추전국 시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분열의 시기인 춘추전국 시대조차 중국에서는 철제 무기의 도입과 함께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우경(牛耕)이 널리 퍼져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으며 괄목할 만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秦)이다. 혼란과 분열기인 춘추전국 시대에도 이미 중국 경제는 세계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월등했는데,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은 진나라 대에 이르러 중국 경제는 한층 더 풍요롭고 수준도 높아졌다.
진나라 왕 정(政)은 법가 사상에 바탕을 두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후 그는 도량형과 문자, 화폐까지 통일했다. 그는 중앙 집권적 군현제를 채용해 단순한 왕이 아닌 최초의 ‘황제’를 표방하며 ‘시황제’가 되었다. 서기전 221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중국에서는 갖가지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시황제는 다양한 화폐를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해 넓은 지역에서 두루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하나의 작은 대륙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을 단일 화폐로 통일해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말하자면 오늘날 유럽 연합(EU)에서 사용하는 ‘유로화’와 같은 화폐를 고대 중국이 2,000년도 더 전에 만들어 사용하며 단일 통화권을 구축했다는 의미이다.
시황제는 ‘군현제(郡縣制)’라는 중앙 집권제를 만들었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각지에서 호족이 할거해 중앙 정부에서 통제할 수 없었다. 시황제가 중국이라는 국가 전체를 중앙 정부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로 개편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시황제의 과단성 있는 통합 덕분에 경제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갖가지 불필요한 장벽이 없어졌다. 요컨대 시황제의 정책으로 상업 활동에 뒤따르는 여러 비용이 큰 폭으로 절감된 셈이다. 중국 상품은 단일 시장에서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 시장은 국가 권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이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상품 흐름(물류)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졌다. 이 정도의 대규모 경제 정책은 당시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시황제의 정책이 너무도 가혹했기에 진 왕조는 고작 15년 뒤인 서기전 206년에 멸망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다투었고 최종적으로 유방이 승리해 서기전 202년에 한(漢) 왕조가 탄생했다. 한은 당연히 진과 반대되는 국가를 세웠고 진의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郡國制)를 채택했다. 유방은 자신을 위해 싸워준 제후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직할지에는 중앙 집권제인 군현제를, 그 외 지역에는 지방 분권제인 봉건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한나라 6대 황제 경제(景帝)는 제후의 권력을 빼앗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제후들이 서기전 154년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다. 오초칠국의 난은 석 달 만에 진압되었고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武帝)의 치세에 이르러 제후의 힘은 약해지고 군주 독재체제가 강화되었다.
진에서 한의 무제에 이르는 80여 년은 황제 독재, 즉 중앙 집권 정책의 역사로 이 정책을 시작한 인물은 진의 시황제, 완성한 인물은 한의 무제였다. 이 정책은 경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