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의 선구적 거장 헨리 제임스
영국과 미국 문학사에서 공히 인정받는 위대한 작품
19세기 사실주의의 정점이자 현대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헨리 제임스의 대표작 『한 여인의 초상』이 창비세계문학 25, 26번으로 발간되었다. 50여년의 집필 기간 동안 소설, 희곡, 평론 등 방대한 글쓰기를 보여준 헨리 제임스의 작품세계를 두고 다기한 평가가 이뤄지나, 초기의 백미인 『한 여인의 초상』이 지니는 대표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을 찾을 수 없다. 헨리 제임스의 복잡하고 특이한 면모에 걸맞게 총체적으로 발휘되는 언어 예술과 상상력의 산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모두 획득한 대표작으로 영미 문학사에 부동의 정전으로 자리하고 있다.
손꼽히는 재력가에 명성 높은 지식인 아버지와 형을 두었던 헨리 제임스는 유년기부터 유럽을 오가며 견문을 쌓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이후 사망 직전 영국에 귀화하기까지 꾸준히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여,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평가받는 한편, F. R. 리비스 같은 비평가들이 영국 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잇는 작가로 꼽는 등 영미 문학사에 공히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런 독특한 배경은 그의 작품세계에서도 주요한 주제의식으로 드러나는데, 평생 미국인도 유럽인도 아니었던 자신의 상황을 깊숙이 파고들어 두 대륙의 문화를 비교 성찰하는 ‘국제주제’로 심도 깊게 다룬다. 이와 더불어 헨리 제임스의 또다른 문학적 성취로 매력적인 여성 인물을 재현하고 그 내면을 깊이있게 형상화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착상의 기원은 전적으로 단 한명의 인물에 대한 느낌, 특별히 매력적인 한 젊은 여성의 성격과 면모였고, 배경을 포함해 ‘주제’에 보통 따라붙는 요소들을 이 인물에 덧붙일 필요가 있었다. 이 젊은 여성이 가장 매력적인 상태에서 흥미롭듯이, 이 소설의 계기(motive)를 해명하는 과정이 내 상상력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발전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일 또한 흥미롭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씨앗에 잠재한 성장의 힘, 싹트고 나와야 할 필연성, 마음에 품은 아이디어가 가능한 한 높이 자라 빛과 공기를 흠뻑 쐬면서 풍성하게 꽃피게 만드는 그런 탁월한 결정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노력이 결실을 맺고 난 후에 집필의 내밀한 과정, 그 과정의 단계를 차근차근 되짚어 재구성할 수 있는 멋진 미래의 가능성—이것이 이야기꾼의 기술이 갖는 매력이다.”(1권 12면, 뉴욕판 「서문」)
『한 여인의 초상』은 독립적이고 지적인 이저벨 아처라는 여성 인물이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도는 위성들”인(1권 23면, 「서문」) 남성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롯한 내면을 가진 개인으로서 이 매력적인 여인의 내적 변화가 밀도 높게 형상화되며 이야기의 주된 축을 이룬다. 이처럼 이 작품은 작가가 평생 천착한 ‘국제주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다뤘을 뿐 아니라 이저벨 아처라는 여성 인물을 탁월하게 재현해냄으로써 헨리 제임스가 이룬 문학적 성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삶의 진경에 눈떠가는 한 여인의 이상과 좌절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이저벨 아처는 어느날 자신을 찾아온 이모 터칫 부인을 따라 미국 올버니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게 된다.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부푼 기대와 호기심을 품고 영국에서 온 이저벨은 이모부 터칫 씨의 저택에서 지병으로 쇠약해진 사촌 오빠 랠프 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부와 지위, 신사다운 태도를 갖춘 귀족 워버턴 경을 알게 되고, 그녀를 뒤쫓아 미국에서 건너온 건실한 사업가 캐스퍼 굿우드와도 마주치지만, 이저벨은 그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한다. 얼마 후 터칫 씨가 죽으며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고 경제적 여유를 얻은 이저벨은 유럽을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중 완벽하고 매혹적인 마담 멀의 소개로 길버트 오즈먼드를 만나고, 재산과 사회적 지위는 없지만 고상한 취향과 교양을 갖춘 그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받아들인다. 2년 후, 이저벨은 자신의 결혼이 마담 멀과 오즈먼드의 교묘한 협잡 속에서 성사되었고 “어둠의 집, 침묵의 집, 질식의 집”에 갇혔음을 깨달으며, 서서히 삶의 ‘진경’에 눈떠간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일년간의 구애 기간에 오즈먼드가 이저벨보다 더 위장했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그의 본성의 절반만 보았다. 지구의 그림자가 부분적으로 가려 달의 한 면만을 보게 되듯이. 이제 그녀는 만월을, 그를 전체로 보았다.”(2권, 188면)
19세기 미국의 신념 체계를 반영하는 인물인 이저벨 아처는 자유와 독립이라는 미국적 이상을 좇으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와 뒤틀림도 간직한 채 자신의 의지를 따르며 나아가지만 황량한 현실의 “만월”을 발견하게 된다. 반짝이듯 매력적인 한 여인이 어떤 이상을 품고, 그 이상에 따라 어떤 선택에 이르며, 그 결과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지를 미국과 유럽, 두 세계에 속한 다양한 군상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줌으로써 외견상 진부한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깊이있는 문학적 주제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특히 작가 스스로 “탐색하는 비평정신의 철야”로 규정한 42장에서는 이저벨이 한밤중에 자신의 삶을 면밀하게 돌아보고 자기의식을 탐색하며 진상에 이르는 과정이 서술되는데, 여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추적하는 작가의 시선이 교묘하게 중첩되며 사실주의의 경지이자 현대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헨리 제임스의 탁월한 서술기법과 문학적 성취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옵저버』 선정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
『가디언』 선정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소설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미국 SAT위원회 선정 도서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언어적 천재 100인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