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고다르의 전체상을 조감 이 책은 첫 장편 영화 [네 멋대로 해라]가 나온 2년 후 고다르 자신이 이 히트작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1962년의 누벨 바그 시기의 인터뷰로부터 시작하여, 장 피에르 고랭과 협력하여 [브리티시 사운드], [만사쾌조] 등의 일련의 급진적인 정치적 영화들을 만들었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의 시기, 70년대 후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로 극 영화계로 복귀한 이후 80년대 중반 [마리아에게 경배를]을 포함한 일련의 극 영화들을 만들던 시기, 그리고 후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하나인 [영화사] 연작과 감독 자신의 자화상 [고다르에 의한 고다르JLG/JLG]에 대해 논하고 있는 1996년의 인터뷰까지 그의 경력의 주요 시기 동안에 저명한 비평가들, 학자들, 저널리스트들과 함께 한 인터뷰들중 중요한 것들 모아 편집한 책이다. 에세이스트이면서 동시에 과학자 고다르는 자신을 에세이스트라고 부르며 마치 과학자처럼 자신의 주제에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접근하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그 주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하는 한편, 영화를 촬영하기도 전에 미리 세부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획하는 할리우드의 제작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할리우드 제작 방식에 의해 고다르가 의도하고 있는 영화를 통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할 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인터뷰들에서 독자들은 이와 관련해 고다르가 어떻게 이 생각들을 발견시켜 나갔는지를 다양한 측면들에서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고다르는 이 책에 실린 1976년 페넬로페 질리아트와의 인터뷰에서 잘 드러나듯이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미리 통제하고, 그 결과를 계산하기 위해서 할리우드에서 대본이 법처럼 지켜져야 되는 사실을 비판하는 한편,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로 촬영된 대본을 제작함으로써, 글로 쓰여진 대본에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살아있는 대상과 카메라/눈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한 새로운 발견을 시도하고 있다고 되풀이하여 밝히고 있다. 영화의 사명으로서의 몽타쥬 고다르는 90년대 이후 근 10년에 걸친 작업인 [영화사] 연작에서 영화와 예술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자기 발전의 최종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고다르는 개빈 스미스와의 인터뷰에서 [젊은이의 양지]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그러한 활달한 미소가 가능했던 것은 감독 조지 스티븐스가 이전에 홀로코스트를 촬영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화사]에서 이 두 이미지들은 겹쳐지며, 고다르는 이것을 이 인터뷰에서 역사적 몽타주라고 부른다. 이 미소와 나치의 시체 소각실의 몽타주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현실에서 서로 가장 관계가 먼 것들이 결합할 때 발생”하며 바로 이것이 “진정한 몽타주가 일어나는 때”라는 고다르의 관점에 대한 예증이 될 것이다. 고다르는 같은 인터뷰에서 몽타주는 영화의 진정한 사명이자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용들은 아마 용감하고 잘 생긴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닐까? 모든 끔찍한 것들은 아마도 구원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단지 힘없는 것들이 아닐까?” - 가장 정반대의 것들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의존성을 보았던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향을 느낄 수 있는 [영화사]에서 들려지고 있는 이 대사는 고다르가 의미하고 있는 몽타주에 대한 비전의 시적인 표현으로 들린다. 하지만 어떻게 이러한 유의 몽타주가 영화의 사명이자 목적이 될 수 있는가? - [영화사]에서 이 몽타주 씬 직전의 고다르의 보이스 오버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 마을, 그 마을의 흰색 벽들과 올리브 나무들을 잊었다/하지만 우리는 피카소를 기억한다/ 즉 게르니카를” 그리고 바로 이 말에 앞서 동일한 보이스 오버는 대중 예술인 영화가 “예술”이 되는 때, 즉 “불타 없어진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 되는 때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다르의 표현을 따라서 그때 그 마을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홀로코스트는 [젊은이의 양지]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소 속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표현들이 지나치게 시적이라면, 홀로코스트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그 미소를 띠게 하였고, 그때 그 마을이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완성하게 하였다고는 말하는 것은 어떨까? 영화는 고다르의 여러 인터뷰들에서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듯이 “자신을 앞으로 던지는” (투사project하는) 매체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바로 그렇게 미소짓게 한 홀로코스트는 역사 속으로 던져지고 있다. 이 끔찍한 사건을 구원하는 역사가 고다르가 생각하는 영화의 역사일 것이다. “생각하는 구조”를 통한 끝나지 않는 대화 이처럼 열네편의 인터뷰를 꼼꼼히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영화사 최후의 거장으로 꼽히는 고다르의 진면목에 다가서게 된다. 이 책에 수록된 1968년의 USC 패널 토론에서 고다르는 브레송의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구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것은 그의 영화가 현실에 대한 어떤 결정적인 해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의문들을 제기하고, 그 의문들을 새로운 해석들에, 즉 현실 속으로 열어 놓고 있는 형식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이것은 브레송 영화에 대한 고다르다운 해석이지만 동시에 고다르 자신의 영화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다르의 영화와 그의 영화에 대한 이 인터뷰들에서의 논의들이 계속해서 수많은 서로 다른 관점들과 해석들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