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박노자의 좌파본색
이곳에 몸담고 살고 있었을 때나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으로 옮겨간 뒤로도 한국사회에 대해 왕성한 글쓰기를 해온 박노자와 유일무이한 인터뷰 전업작가 지승호가 만났다. 《좌파하라》가 가지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의 다른 책들처럼 일정 시기에 써온 글들을 묶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박노자의 ‘좌파본색’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가 한국의 다른 비판적 (내지 진보적) 지식인들과 무엇이 다른지, 향후 그의 글쓰기가 어디에 집중될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박노자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륙으로부터 온 예기치 않은 선물, 박노자
동방의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20대 후반의 젊은 러시아 지식인 티코노프 블라디미르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처음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사회주의 소련에서 태어나 자라 자본주의 러시아로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본 사람이다. 과거의 소련사회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일당 지배의 ‘국가자본주의’체제로 파악하는 그는, 체제가 해체되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가려져 있던 사회의 드러난 알몸-전체주의적 실체-을 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탐욕을 향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러시아의 새로운 길에 동의할 수도 결코 없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노암 촘스키의 가계(촘스키의 부모는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 유대계 지식인들이었다)처럼, 박노자의 부모 역시 유대인이며 인텔리겐차였고 그 덕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왕성한 독서욕을 지니고 일찌감치 학자적 자질을 길러오고 있었다. 부모님의 종교와 다른 불교사상 속에서 무욕(無慾)과 견성(見性)의 길을 발견하기 시작했던 그는 고교 시절 우연히 본 북한영화 <춘향전>을 보게 되면서 한국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와 근접한 북한이 아니라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동북아 정치상황의 변화 때문이었다. 북·소 관계가 소원해지고 대신 한·소 수교가 시작되면서 서울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대륙으로부터 온 예기치 않은 선물, 박노자는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자칭 진보 혹은 좌파들을 향한 쓴소리
박노자와 다른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가르는 본질적인 기준은 하나다. 그것은 작금의 자본주의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당장은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을 포기하고 재벌지배의 모순을 바로잡거나 수리하는 것이 당면 목표이며 이마저도 중앙권력을 장악하거나 적어도 참여할 때 가능하다고 보는 자유주의 내지 진보 우파(민족주의 계역을 포함하여)의 입장이 하나라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미 근원적인 위기에 봉착했으며 주변국들에 대해 위기를 전가하고 더 가혹한 착취를 통해서만 겨우 유지될 수 있을 뿐, 결코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위기에 다다를 것이라는 게 다른 한 가지 입장이다. 박노자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조차 갖고 있지 못한 한국의 재벌체제의 해체를 시작으로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사회를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삶의 벼랑 끝으로 밀려나고 있는 노동자를 위시한 한국 민중들의 저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자본과 권력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후의 전망을
포기한 진보 우파와 자유주의자들(혹은 정당)이라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한국 지식인들의 끼리끼리 봐주는 관례를 벗어나 거침이 없다. 좌파의 이념이 관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되지 못하는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원샷통합’을 거행한 ‘정객들’을 향해 쏟아내는 그의 언설은 그래서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장하준 식 스웨덴 복지를 난타하다
우리에게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쫓느라 서유럽 복지가 그나마도 먼 꿈인 것이 현실이지만, 서유럽식의 관리사회적 복지제도 역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따져지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2년 7월 22일에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70여 명을 총기로 난사해 살해한 블레이비크 사건은 북유럽 복지사회에서 생겨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서유럽이나 북유럽 사회를 마치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동향과 무관한 고정된 모델로 상정한 장하준 식의 ‘스웨덴 모델’이 심각한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는 기본적으로 계급갈등의 산물이다. 서유럽식의 관리사회적 복지제도는 지속적인 성장과 고용이 보장될 때 작동할 수 있었던 하나의 제도모델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근본적 위기에 봉착했고, 이전과 같은 성장이 더 이상은 불가능해진 현실에서, 게다가 이미 그들 나라에서 복지제도가 급속히 후퇴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진보가 그러한 제도를 교과서처럼 암기하는 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상위 1% 내지 5%의 부를 가져와서 나누어주는 부의 재분배 프로그램, 자본의 사적 소유영역을 과감히 축소하여 그러한 재분배가 지속적일 수 있도록 공공화하는 것, 모든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 이런 방향으로 복지가 재구성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삶이 추락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박노자의 인식인 것이다.
박노자, 여전히 혁명을 꿈꾸다
자본주의는 이미 수명을 다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기조절 능력을 갖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자본주의는 10개월짜리 아이와 본질상 똑같다는 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정의이다. 문제는 인간의 고통이다. 마치 천재지변이 올 때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희생당하듯 자본주의의 몰락과정은 수없는 인간의 희생을 밟고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몰락을 향해 가는 자본주의의 고장 난 기관차를 멈춰 세우고 지금 고통당하는 민중에게 새로운 인간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자고 제시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좌파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사회에서 보이고 있는 좌파의 우경화는 시련을 겪고 있는 민중에 대한 배신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자본주의로부터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사회를 꿈꾸고 그것을 선취하려는 노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미래이다. 인간을 위한 자본주의는 없다. 자본주의라는 고장 난 차를 수리해보겠다는 시도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전면적 위기의 시대인 지금 시대착오적인 망상일 뿐이다. 정녕 길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 더 민주적인 국제적인 싸움을 조직하는 것, 이제 박노자의 새 책 《좌파하라》로 들어가 볼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