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
이 세계에서 끝끝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기적 같은 일에 대하여
다시 태어나는 한강 문학의 클래식
길 위에서, 가만히 매듭을 짓다
점 세 개를 이어 그린 깊은 선 하나
오늘의 한강을 있게 한 어제의 한강을 읽는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강이 현재까지 출간한 소설집 전 권(총 세 권)의 개정판이다. 한국소설문학상(1999),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0), 이상문학상(2005), 동리문학상(2010), 만해문학상(2014), 황순원문학상(2015), 인터내셔널 부커상(2016), 말라파르테 문학상(2017), 김유정문학상(2018), 산클레멘테 문학상(2019), 대산문학상(2022), 메디치 외국문학상(2023),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2024), 노벨문학상(2024) 등을 수상한 한강은 단단하고 섬세한 문장을 통해 삶의 근원에 자리한 고독과 아픔을 살피며 지금 이 시대와 공명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지금까지 펴낸 소설집은 모두 세 권. 1995년부터 2012년까지, 17년 사이 씌어진 작품들이 담긴 세 권의 책은 2018년에 새로운 옷을 입었다. 빛깔도 판형도 저마다 달랐던 세 권의 책을 조심스레 이어 하나의 선 위에 두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스물서너 살 때의 작가가 1년 동안 휘몰아치듯 썼던 단편을 모은 것이 1995년 한강의 첫 소설집이자 통틀어 첫 책인 『여수의 사랑』이다. 5년 만에 출간된 두번째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에서 한강은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하는 과정이 바로 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만난 듯하다가, 이내 다시 묻는다. “이 한 편 한 편의 소설들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작가의 말」) 그리고 12년이 지나 세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을 펴냈다. 그 사이사이에 장편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이 씌어졌다.
단편은 성냥 불꽃 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당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작가의 말’(2012), 『노랑무늬영원』
돌아보아야 궤적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집 세 권이 출간되는 동안 한강 단편소설에서 변화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여수의 사랑』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갈망을 간절하게 드러내며, 떠나고, 버리고, 방황하고, 추락하는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들은 『내 여자의 열매』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과 서로를 서툴게 받아들이려다 어긋나버리고 상처 입는다. 그리고 『노랑무늬영원』에 이르러 재생의 의지와 절망 속에서 생명력은 더 강하게 타오른다. 존엄해진 존재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마침내 상대를 껴안으려 시도한다. 끝내 돌아가고야 말 어딘가이자, 잎맥을 밀어 올리는 이파리, 회복기에 피어난 꽃, ‘점을 잇는’ 작업 동안 오롯이 담아내고자 했던 자연스러운 변화와 흐름은 표지에 사용된 사진작가 이정진의 작품과 조화를 이룬다.
한편 변함없는 것은 한강의 치열한 물음이 아닐까.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존재, 삶과 죽음, 이 세상에 대해서 스물한 편의 소설 내내 묻지만 필연적으로 답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파르스름한 불꽃 같은 그 물음 자체가, 물음에서 파생되는 고독의 열기와 세심한 슬픔이 작품 속 그들을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고 살아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변화했으나 변하지 않았으므로, 신중하게 소설들의 배치를 바꾸었고 몇몇 표현들을 손보았지만 두어야 할 것은 그대로 두었다.
앞서 “누구”를 묻던 『내 여자의 열매』 속 작가 자신의 물음에, 『노랑무늬영원』의 새로 씌어진 작가의 말을 이어본다. 그 궤적을 함께 되짚어보길 권한다. 누군가, 스무 해 남짓 홀로 써왔다. 한강은 여전히, 걷고 있다.
알고 있다. 이 소설들을 썼던 십이 년의 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 모든 문장들을 적어가고 있었던 그토록 생생한 나 자신도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이 상실로 느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작별의 말이 아니어야 하고, 나는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작가의 말’(2018), 『노랑무늬영원』
지극히 단순하고 말갛게, 직관적으로 다다른 어떤 자리에
불현듯 찾아드는 청량한 삶의 감각
『내 여자의 열매』
첫 소설집 이후 5년 만에 출간한 두번째 소설집. 〈채식주의자〉 연작의 씨앗이 된 「내 여자의 열매」 등을 포함한 단편 여덟 편의 배치를 바꾸고 표현과 문장을 다듬어 새롭게 선보인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인간은 작은 박새처럼 쉽게 파괴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인 동시에, 분열되고 찢긴 삶에 숨을 불어 넣어 다시 태어나고자 삶의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새로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강지희는 한강 소설 속 여성 인물에 주목한다. “그들은 체념하며 포기하지도 격렬하게 싸우지도 않은 채 고요하게 자리해 있는데, 누구보다 강하고 생동하는 욕망 속에 있다”. 표제작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자유를 꿈꾸던 아내의 계획은 모아둔 돈을 전세대금으로 넣으며 멈춘다. 남편은 처음부터 “세상 끝” “가장 먼 곳” “지구 반대편까지 쉬엄쉬엄” 가보고 싶다던 아내의 꿈을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몽상이라 취급한다(p. 19). 결혼 생활은 남편에게 “모든 것이 적당히 덥혀진 욕조의 온수”(p. 35)처럼 따뜻한 것이었으나, 아내는 점차 말수를 잃어가고 햇빛만을 갈망하며 살갗 전체에 푸른 피멍이 번진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온 날, 아내는 식물이 되어 있다. 식물로 변한 아내는 오히려 생생해지고, 강인한 활력이 넘쳐흐른다. 더 이상 어떤 상처도 입힐 수 없고, 무엇에도 파괴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이다. 표면적인 결혼 생활에 지친 「아기 부처」의 ‘나’,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 무기력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여자, 엄마가 떠난 뒤 광기에 빠진 아빠와 떠도는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의 아이 등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고단한 세계를 고요하고 격렬하게 거부하면서 내적인 투쟁을 통해 맑고 빛나는 세계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한강의 소설은 약하고 연한 살성과 물질인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다. [……] 뼈는 인간 역시 모든 생물들처럼 영원할 수 없고 언젠가 죽음이라는 물질의 세계로 반납될 것을 알리는 증표이지만, 한강이 ‘흰 뼈’를 말할 때 그것은 영원히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 눈송이처럼 훼손될 수 없는 인간 안의 어떤 것을 상기시킨다. 세계는 어두운 환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인간 안에는 외로운 흰 뼈들이 조용히 자리한 채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것들이 예기치 못한 때에 서로 부딪치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순간이 올 것을 그는 믿는다. _강지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