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리, 더 많이’에서 벗어나 ‘깊이’를 추구하라.
갈수록 ‘혼자’에 익숙한 세대라고 한다. 온전히 얼굴을 마주하는 대화의 부재는 더 이상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TV, 인터넷, 모바일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했듯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페이스북에서의 우정과 데이트앱을 통한 사랑 같은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과 빠르고 효율적인 시민운동 등 새로운 측면에 주목하며, 우리의 진보한 소통 기술을 그저 축하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했던 나지만, 셰리 터클이 관찰해 낸 학교와 가족, 노동 현장의 모습은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일부 사례들은 두렵기까지 했다.
갈수록 시선을 맞추지 않는 우리 모두가 이 글에서 말하는 문제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미래에 뒤처지기를 바라지 않기에 멈추지 못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테크놀로지와의 로맨스를 망치지 않더라도,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를 재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곧 로봇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지금은 물러설 때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론은 필요하며, 그녀는 이미 토론의 장을 펼쳐보였다.
―김소영 아나운서(당인리책발전소 대표)
야후와 IBM은 왜 재택근무자를 다시 회사로 불러들였을까? 그 이유는 “대화를 많이 나눌수록 생산성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기술심리학자들의 연구는 긍정적인 가정들을 뒤엎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멀티태스킹은 흥분도를 높이기 때문에 마치 성취도가 높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오히려 유니태스킹이 집중력을 높인다는 역설. 또 공유와 연대를 자랑하는 SNS 활동은 오히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하고 있다는 사실. 연결돼 있지 않으면 분리불안을 느끼는 SNS세대는 느슨한 연대를 강한 결속으로 착각하고, 고독을 즐기는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함으로써 창의력과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
우리야말로 대화를 잃어버린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될 수도 있다. ‘더 빨리’를 위해 ‘더 깊이’를 잃어버리고, ‘능률’만 따지다가 ‘본질’에서 벗어나고, ‘편리’를 위해 ‘관계’를 희생시키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공감 능력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독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은 ‘살아 있는 대화’에 의해 증진된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SNS의 익명 댓글들이 시사하는 바는 테크놀로지가 아직 책임감 있는 민주주의 시민을 길러내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독은 혁신의 필수조건이며, 마음공간은 창의력의 시작점이며, 프라이버시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다. 우리는 왜 대화를 회복해야 하는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공감력을, 회사 차원에서는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라고 셰리 터클은 주장한다.
● 아이가 그토록 핸드폰 메시지에 집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얼까?
아이들이 진짜 부모와의 대화를 싫어할까? 지금 아이들이 SNS 속을 헤매고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자.
“아빠가 신문을 읽고 있을 때라면 주말 스포츠 경기라도 질문하며 방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가 노트북컴퓨터 앞에 있을 땐 달라요. 아빠가 사라져 버리거든요.”
부모는 자식들이 집에 없을 때는 주변을 맴도는 ‘헬리콥터’가 되지만, 정작 시야에 있을 때는 휴대폰으로 주의를 돌린다. 아이가 눈에 안 보일 때만 관심을 갖는 패러독스 현상이다. 심지어 가족 캠핑에서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다며 부모가 아예 휴가를 일찍 끝내버린 사례도 있다. 셰리 터클은 아이들이 친구들의 우정을 휴대폰에 즉시 응답하는 대기상태로 그 기준을 정하는 이유에 대하여, 부모에게 기대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설명한다.
● “고독한 군중”의 시대에서 “함께 외로운” 시대로
2000년대 초에 SNS는 기회 확대를 가져다주는 신천지였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심리적인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FOMO(Fear of Mission Out)로 알려진 ‘기회 상실의 두려움’은 SNS의 편리성이 주는 대표적인 불안 요소로서,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늘 나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라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현상이다. 그렇게 신중치 못한 선택 앞에서 구조적으로 후회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더 이상 ‘카르페 디엠’을 즐기지 못하고 끊임없는 불안감을 겪는다.
특히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에도, “지금 여기가 최선일 수 있다는 걸” 잊고는 다른 잃어버린 기회들을 생각하느라 깊은 대화로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현재에 집중하지 못함으로 인해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기회도 놓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비인격화된다. 20세기가 ‘고독한 군중’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함께 외로운’ 시대가 됐다.
SNS는 ‘공감을 위한 보조 바퀴’로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 셰리 터클은 테크놀로지의 적극적인 활용을 주장하는 기술심리학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 존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술에 지배당하지 말고 기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키우자고 역설한다.
● 기술에 지배당하지 말고 기술을 다스려라!
지금 아이들은 우정을 정서의 필수 요건으로 생각지 않고,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는 유용성 차원에서 판단하게 되었다. 이들은 친구를 “온라인 대화에서처럼, 언제나 원하면 바로 끊을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앱의 사고방식은 무엇보다도 모든 관계를 비인격화시킨다. 깊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저해하고 복잡한 인과관계를 간과하게 만들어 우정과 사랑조차 자판기 커피 뽑듯 단순한 주고받기나 상품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지루함을 내면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찾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 우리의 마음은 일하는 중에도 공상에 잠길 때가 있다. 마음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환상에서 귀환할 때 마침맞은 것이 딸려 오기도 한다. (……) 그러나 앱의 사고방식은 세상 이치가 알고리즘처럼 돌아간다는 발상에서 시작된다. 특정한 행동들이 예측 가능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 앱의 사고방식은 우정에서도 공감력의 부재로 표출될 수 있다. 우정을 관리해야 하는 것, 많이 거느리는 것, 도구를 가지고 대처하는 것으로 본다.”
● 공감력을 희생시키지 마라!
이러한 사고방식이 왜 문제일까? 이처럼 매뉴얼화된 사고 패턴은 학교와 일터에서 창의력을 저해하고 혁신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삶과 능력 있는 삶 모두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셰리 터클은 디지털 러다이트를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테크놀로지를 우리의 창의, 혁신,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재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애착관계 형성은 평생에 걸친 중요한 과제다, 우리의 보호막이기도 하면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굴을 맞대지 않고 상대의 반응을 정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SNS 대화에 익숙한 아이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도 표정과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대하기 쉽고, 그 결과 평소 온순한 아이들도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급격하게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시선의 마주침을 통해 공감 능력을 키워 사랑을 배우게 되는데,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핸드폰만 내려다보고 있는 청소년들은 그 공감 능력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사랑이란 그 사람 앞에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픈 욕구가 잘 들지 않는 것”이다.
“공감은 내가 상대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의 기분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상대가 믿을 때까지 오래 머무는 것이다. 공감에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