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네팔 이주노동자들, 한국 생활을 시로 쓰다 지금껏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와 목소리는 한국의 활동가들에 의해서 대신 전해졌었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자신의 내면과 삶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문제적인데, 그것을 시로 표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네팔 이주노동자들은 이 시집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면서도 어떤 공통된 정서를 내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노동자 생활에 대한 단순한 고발이나 항의를 넘어선다. 물론 고된 노동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전체 시의 기조를 이루지만, 이들은 그 노동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집에 참여한 네팔 이주노동자들에게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실제적인 죽음을 가리키기도 하고 존재의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무나, 너의 ‘머던’은 여기 일하러 온 한국에서 존재감이 없다 자존도 없고, 긍지도 없고 그 어떤 존재감도 없구나 -「머던의 넋두리」 부분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게 낯선 나라다 누군가의 행복, 누군가의 사랑을 빨간 관 속에 넣어서 고국으로 보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억의 물결들」 부분 어느 보도에 의하면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단지 네팔 이주노동자들만이 아니라 한국 내에 만연해 있는 산재와도 연동되어 있겠지만, 이 시집에서 자주 드러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의식은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영혼, 내면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말하기에 앞서 한국 사회가 이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강요하고 있는지 우리는 「고용」이란 뛰어난 작품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하루는 삶에 너무도 지쳐서 내가 말했어요 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과 결핍을 해결해주셨어요 당신에게 감사드려요 이제는 나를 죽게 해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알았어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죽으렴! -「고용」 부분 이 작품의 표면에서는 죽음이라는 실존의 거대 사태도 노동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죽음까지 생각하게 하는 고된 삶을 먼저 이해하면 전혀 다르게 읽힌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의 임금노동 자체가 이들에게 죽음 의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실린 노동자 시인들은 그 현실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심각한 무력감에 빠져 자탄을 하거나 방황을 하는 방식이 있고, 두 번째로는 고국인 네팔의 자연과 생활을 기억함으로써 맞서고 있다. 물론 자탄과 방황은 맞서는 행위라기보다는 회피의 한 방식이지만, 여기서 이들에게 도덕적 지탄을 하는 것은 온당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한국 사회는 기계와 로봇의 사회다 두 번째 방식인 고향에 대한 기억의 소환은 뜻밖의 성과를 달성하기도 한다. 그것은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문명사적 비판이 되기도 한다. 시집 제목이 들어 있는 「기계」라는 시를 잠깐 보자. 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여기는 재스민과 천일홍들이 애정을 뿌리며 웃지 않는다 새들도 평화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여기는 사람들이 기계의 거친 소음과 함께 깨어난다 하루 종일 기계와 함께 기계의 속도로 움직인다 장마철에 젖은 산처럼 몸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에 젖어 스스로 목욕을 해도 이 쉼터에서는 시원하지 않구나 사람이 만든 기계와 기계가 만든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다가 저녁에는 자신이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구나 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여기는 사람이 기계를 작동시키지 않고 기계가 사람을 작동시킨다 -「기계」 부분 한국 사회가 기계와 로봇의 사회라는 현실 인식은 국내의 시인들에게서도 잘 보이지 않는 예리한 관점이다. 국내의 시인들은 도리어 기계와 로봇을 받아들인 것만 같은데, 네팔의 노동자 시인들은 이 같은 사태에서 존재의 위기를 느낀다. 비단 「기계」라는 시뿐만이 아니다. 여러 작품에서 네팔의 노동자 시인들은 한국 사회가 기계화, 로봇화되었으며 자신들에게 기계와 로봇의 부품이 되길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나는 이 로봇의 나라에서 밤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눈을 감고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어머니의 알람」 부분 알람이 울려서 일어났어요 오른손으로 가슴을 만졌어요 다 괜찮네요, 행복해졌어요 그리고 로봇들의 세상으로 출발했어요 -「낯선 나라에서」 부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문맹처럼 로봇을 만드는 나라에서 로봇이 되어 자신의 성실한 노동의 시간을 보낼 때 가끔은 휴대폰의 사진첩을 본다 -「나」 부분 이 점이 이 시집의 의의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은, 이 타자들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내면화된 이질적인 타자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해설’을 쓴 황규관 시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이 앤솔러지에 실린 작품들을 통독하면서,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내면 상태를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었으며 도리어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일은 부끄럽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섣부른 동정이나 연민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그런 감상이 이들을 모욕하는 것임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이들의 영혼은 역설적으로 우리보다 건강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의식이나 자탄과 방황은 네팔 이주노동자 시인들의 영혼이 건강하다는 증거일 터인데, 우리가 보지 못하는 현실의 이면을 이들에게 들킨 것은 아직 기계의 사회가 아닌 고향 네팔의 기억 때문이다. 여러 작품에서 고향 네팔의 풍속, 역사, 자연 등이 등장하는 것은 그 기억들이 한국 사회와 맞서는 항체를 형성해주기 때문이다. 대자연과 가까이 지냈던 이들에게 한국 같은 빈틈없는 자본주의사회가 지옥의 다른 이름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 아닐까? 한국 사회가 많은 이주노동자들의 값싼 노동으로 지탱하고 있음은 숨기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 진실이다. 모쪼록 이 시집을 시작으로 보다 많은 이주노동자 시인들이 탄생하길 바라며, 아마도 이런 일이 일어날 때 한국문학에도 그들이 끼치는 영향은 자못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