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비안 마이어에 관한 최초의 공인된 전기
★ 미출간 사진 포함 400여 점의 작품 수록
★ 화제의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그 이후의 이야기
비비안에 관한 가장 강력한 신화는 그녀가 소외됐고, 불행했고, 무엇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슬픈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 비비안은 끈질긴 회복력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았다. _ 서문에서
20세기 거리 사진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작가
은둔과 역설의 상징이자 불가해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
비비안 마이어에 관한 완벽한 초상
“나는 내 인생을 가지고 왔고,
내 인생은 이 상자들 속에 들어 있어요.”
2007년 시카고의 한 경매장에 나온 상자가 미국 사진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전 세계에 ‘비비안 마이어 현상’이라 불러도 좋을 돌풍을 일으키기까지, 모든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자신이 집필할 책에 실을 자료 사진을 구하기 위해 경매장에 들른 청년은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현상조차 하지 않은 필름들로 가득한 상자를 구매한다. 시험 삼아 인화해본 사진들에 매료된 청년은 그중 몇 장을 인터넷 사진 공유 사이트에 올렸고,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무명 작가의 작품에 열광했다. 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작가의 작품과 삶이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강연과 전시가 열렸으며, 베일에 싸인 작가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어 수십 개 나라에서 개봉되었다.
하지만 사진의 주인에게 다가갈수록 더 많은 비밀과 의문이 쌓였다. 프랑스에서 자랐고, 뉴욕과 시카고에서 보모로 일했으며, 극히 제한된 인간관계를 맺었다는 것 외에는 도무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무례하고 오만하며 심술궂은 ‘사악한 마녀’였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중하고 다정하며 책임감 강한 ‘메리 포핀스’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15만 장에 이르는 작품을 남길 정도로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그 결과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대부분의 필름을 현상조차 하지 않은 채 상자에 넣어 창고에 방치했고, 창고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다. 가장 친한 지인이나 고용주도 그의 기본적인 가족관계나 성장 배경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고, 어떤 이는 자신의 보모에게 카메라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이처럼 모순적이고 미스터리한 작가의 삶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앤 마크스는 이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는다. 8톤의 창고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던 잡동사니 가운데 비비안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단서를 찾고, 프랑스 시골 마을과 뉴욕 문서 보관소를 뒤져 어쩌면 작가가 평생 숨기고 싶었을 그 집안의 가계도를 완성한다. 그리고 14만 장에 이르는 아카이브에 접근할 유일한 권한을 허락받아 작가의 작품을 그의 삶의 맥락에서 해석할 단초를 마련한다. 치밀한 연구와 끈질긴 추적 끝에 무심하고 냉담한 겉모습 뒤에 지성과 연민과 영감으로 가득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 자신의 작품을 금세기 사진 분야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만들 창조적이고 진지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마침내 비비안 마이어라는,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사진가의 삶과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증명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사람
비운의 그림자를 걷어낸 곳에서 드러나는
진취적이고 타협하지 않았던 한 예술가의 삶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아니에요. 인생은 희극이에요. 그냥 웃으면 돼요.”
앤 마크스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다층적인 인물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비밀들에 다가서기 위해 가장 먼저 그의 가장 가까운 가족의 가계도를 추적하고 혼외자, 중혼, 부모의 방임, 약물 남용과 폭력, 정신 질환 등으로 얽힌 복잡한 가족사의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비비안의 오빠인 칼 마이어의 존재와 그 불운한 삶을 최초로 밝혀냄으로써 비비안의 사후 유산 처리를 둘러싼 문제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한 바 있는 저자는,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정에서 비비안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에 주목한다. 과거와 과감하게 절연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삶을 유지했고,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는 보모 일을 감수했으며, 그 와중에도 비비안 마이어는 그 자신으로 살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50년 이모할머니가 남기고 간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 비비안 마이어는 그곳에서부터 40여 년간 지속될 사진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박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엄청난 에너지와 호기심으로 오트잘프의 날카로운 봉우리, 깊은 계곡, 거친 시골 풍경, 무엇보다 독실한 가톨릭 전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지역 사람들과 노동자들의 사진을 찍었다. “과거를 빼앗긴 사람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는다”라고 했던 수전 손택의 말이 떠오를 만큼, 이 시절 초기 작품에는 비비안이 처음부터 부지런히 사진 기술을 익혔고, 촬영 대상과 주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증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스 카메라를 정사각형 모양의 사진으로 인화할 수 있는 롤라이플렉스로 바꾼 뒤, 비비안의 작품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급격히 성장한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에서, 시카고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비비안은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순수한 것, 뒤틀린 것 모두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했고, 도시와 시골의 풍경에서 고유의 대칭과 패턴과 질감을 발견했으며, 그 유명한 자화상 사진들을 통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세상에 보여주었다.
비비안 마이어는 카메라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진지한 사진작가를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료 사진작가들과 교류하고, 사진엽서를 만들어 판매하려는 등의 노력과 시도는 어느 시점부터 사라지고, 평생 찍은 15만 장의 사진 대부분을 현상도 하지 않은 채, 상자 속에 던져넣고 창고에 봉인해버린다.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로 한 비비안 마이어의 결심은 그의 사후 유산 처리 과정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킨 요소였고, 비비안 마이어의 팬들은 그의 작품을 음미할 때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묘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비비안 마이어를 둘러싼 미스터리 중 가장 중요한 비밀이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이 지점에서 앤 마크스는 한편으로는 ‘세상과 담을 쌓은 불운한 천재’라는 식의 납작한 해석을 거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간 언론과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간과해왔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비비안을 옭아매온 ‘저장 장애’와 편집증의 원인 및 그 영향을 재조명한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정을 드러내고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작가가 세상에 대한 자신의 깊은 이해를 드러내고 그 세상에 참여하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고풍스러운 옷차림, 바셀린을 듬뿍 바른 무표정한 얼굴에 단호하고 직설적인 말투, 남성용 구두를 신고 두 팔을 휘저으며 군인처럼 소리 내어 걸었고,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지만 거리를 오가는 이들을 찍을 때면 무례할 정도로 거침없이 돌진했던 사람으로 비비안 마이어를 기억한다. 그러나 비비안 마이어는 오버사이즈 코트 아래에 리버티 오브 런던의 화려한 패턴이 새겨진 블라우스를 입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다방면의 지식과 놀라운 유머 감각을 뽐냈으며, 카메라에 담은 피사체의 반응에 늘 신경 썼고, 사회에서 소외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 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