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게 맞나? 이렇게 써도 될까? 브이로그, 광고, 캠페인, 학급 통신문까지 1년 전쯤, 웹예능 ‘핑계고’와 tvn 예능프로그램 ‘유퀴즈’에서 자막 논란이 일었다. 출연자와 진행자가 ‘유모차’라고 말했는데, 자막으로는 ‘유아차’로 나와서다. 당시 온라인상에서 ‘모’(母, 엄마) 대신 ‘아’(兒, 아이)를 강조하는 이 단어를 페미니즘 ‘세력’이 강요하고 있다며, 제작진에 대한 ‘페미 검증’을 해야 한다거나 국립국어원이 성별 갈등을 조장한다는 등의 여성 혐오적 주장이 득세했다. 젠더 문제가 사회적으로 중하게 다루어질수록, 젠더 표현 문제는 더 자주 더 시끄러운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것은 좋은 징조다. 익숙하게 쓰던 표현에 차별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변화의 정확한 방향이다. 정교한 나침반을 찾는다면,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이 제격이다.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은 일본의 여성 기자들이 더 평등하고, 더 안전감을 주며, 더 포용적인 젠더 표현을 제안하기 위해 쓴 책이다. 처음엔 언론계 내부용으로 배포할 계획이었지만, 소셜 미디어와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뉴스 생산자가 될 수 있는 현 시대에 발맞춰 사회 구성원 모두를 향한 책으로 나오게 됐다. ‘실패 없는 젠더 표현’이 필수인 학급 통신문, 관공서 및 기업의 홍보물, 광고, 캠페인 등의 담당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많다.(32쪽) 젠더 표현의 핵심은 정답이 아니라 방향 이 책은 기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정답을 알려주는 해설지가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던 표현들을 젠더 관점에서 살펴보고,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나가야 하는지 기초부터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첫 단계는 구체적인 차별 표현을 확인하는 것. 저자들은 일본의 일간지, 지방지, 블록지 등에서 성차별적 표현들의 사례를 모아 하나씩 소개한다.(1장) - 여사, 영부인은 어쩔 수 없이 써야 할까요?(46-47쪽) - 일과 가정의 양립은 왜 여성에게만 묻나요?(52-53쪽) -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은 비극인가요?(95-96쪽) - 여성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성폭력 예방 캠페인(219쪽) 표현은 심층의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것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의 생각이 말과 표현을 낳고 사회에서 지지를 얻으면 이를 반영한 정책이 생겨난다. 동시에 제도가 언설을 정당화하고 사람들을 이끌면서 개인의 사고에 뿌리내린다.”(30쪽) 이를 너무나 잘 아는 기자로서 저자들은 아주 작은 ‘먼저 차별’의 사례들까지 건져 올린다. 여사, 영부인, 미망인의 공통점은? 여사와 영부인에 대응하는 남성형 표현이 없다는 것은, 특정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의 전형을 ‘남성’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남사’나 ‘영부군’ 같은 표현이 생성될 공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의 경우는 ‘first gentleman’에 해당하는 표현이 있으며, 최근에는 ‘first spouse’나 ‘presidential spouse’처럼 성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추세다. 이 책은 미망인, 영부인, 여류 등 여성에게만 사용하는, 짝이 되는 표현이 남성에게 존재하지 않는 호칭은 피할 것을 제안한다.(47쪽) 어떤 표현이 성차별적이라고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성차별적인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려주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중요한 것은 “왜 이 표현이 문제인지, 그 배후에 숨은 구조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39쪽) 제목부터 댓글까지 웹에서 일어나는 낚시와 괴롭힘 이 책은 웹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2장) 인터넷판 뉴스의 가장 큰 문제는 클릭 유도를 위한 ‘낚시성’ 제목이다. 저자들은 조회 수(페이지뷰)를 무시하느냐 집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젠더 표현 사례를 살피면서, 조회 수가 ‘금단의 열매’라고 말한다. 조회 수를 노리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약자들의 소리를 세상에 전해야 할 미디어가 도리어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126쪽)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웹에서 표현을 주도하는 것은 단지 기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블로그, 브이로그, SNS, 심지어 댓글까지 표현의 장은 다양하다. 저자들이 여러 전문가 인터뷰를 진행한 이유다. 대중을 대상으로 스마트폰 사용법 강의를 하는 강사(132-149쪽), 온라인 괴롭힘을 심하게 겪은 여성들을 변호 중인 변호사(150-166쪽), 여성에 대한 뉴스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언론조직을 경험한 기자(167-185쪽) 등이 젠더 표현의 생산 및 수용의 현실을 낱낱이 이야기한다. 강간은 ‘몹쓸 짓’? 이 책의 3장에서는 성폭력 보도 및 2차 가해 문제를 면밀히 살핀다. 성폭력 문제가 “개인이나 사회의 의식에 잠재한 편견 및 차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188쪽) 저자들은 성폭력을 ‘난폭’으로 표현하거나 성욕을 참지 못한 남성의 우발적인 범죄로 묘사하는 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한국에서도 강간을 ‘몹쓸 짓’으로 표현하거나,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은근히 피해자를 비난하는 어조로 쓴 기사들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있어왔다. 이러한 보도의 문제점은 표현뿐 아니라 ‘태도’에 있다. 저자들은 피해자의 편에 서는 태도를 강조하는데,(246-250쪽) 이는 결국 성폭력 문제에 어떤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와 직결된다. 표현의 문제와 무관한 것 같은 강간 신화, 동의, 힘의 격차 등에 적극적으로 지면을 할애한 이유다. 젠더 표현을 둘러싼 갈등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신호가 되려면 표현은 관점을 반영하며 재생산하고 바꾸는 중요한 요소다. 관점은 개개인의 기질보단 사회와 공동체가 길러내는 가치와 연관이 깊다. 정답 표현보다 옳은 방향의 표현을 계속해서 탐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젠더 표현의 변화가 어떤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는지 경험한 바 있다. 윤락이 매춘/매매춘을 거쳐 성매매라는 용어로 바뀌면서 성 구매자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성 판매자의 노동자성 문제까지 다룰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성 전환 수술이란 용어가 성 확정 수술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성이 태어남과 동시에 지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쪽으로 관점이 이동하는 과정과 정확히 겹친다. 우리가 방향을 잘 설정한다면, 젠더 표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은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방향을 설정하는 준거점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