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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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배지, 시간의 절벽에서만 솟아날 수 있는 ‘불가능한’ 질문 1992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시인 이원이 등단 20년을 맞아 네번째 시집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문학과지성사, 2012)를 출간했다. 세번째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2007) 이후 만 5년에 걸쳐 쓴 57편의 시를 총 4부에 나누어 묶은 이번 시집에서 실존의 한계성, 사물들의 본질, 고독에 거함으로 가닿을 수 있는 세계 너머에 대한 이원의 고찰은 무르익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시인은 지상의 시간에 “빗금의 발목”으로 서서 응시하거나, 세계의 배후와 인접한 경계에 간절히 매달리거나, 해수면과 허공 속에 시선을 두거나 몸을 내맡긴 “인간의 기분”을 집요하리만치 묘파하고 나선다. 그간 이원의 시를 얘기할 때, 초기 시집(『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1996,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2001)들에서 두드러졌던, 탈영토적인 디지털 시대/세계에 대한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이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한 시구로 수렴되면서 독자와 평자들의 성마른 독해와 편협한 평가가 대부분을 이뤘다. 그러나 시대의 징후를 독특한 언어 형식으로 드러내는 데 예민했던 것만큼이나 ‘자기 시대의 존재 조건에 대한 성찰과 탐구’ 역시 이원 시의 한 근간임도 주목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는 거울과 그림자를 매개로 삼아 존재의 심연, 사물들의 내밀한 고독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적 목소리로 가득했던 세번째 시집을 거쳐 이번 시집에서 더욱 심화되고 전면화한 양상을 띤다. 도시의 서늘하고 낯선 그늘과 일상 속에 감추어진 존재의 고독,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접변한 지점에서 존재의 배후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예감하는 고된 행보, 그래서 알게 된 세계의 비밀을 공유하는 57편의 수상록, 바로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이다. “가볍고 사소해 마치 인간이 된 기분” 이번 시집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어둠의 가장 아래쪽, 검은 시간 안에서 이뤄지는 수직 수평의 작은 소요에도 민감할 뿐더러 부재와 불가능의 상황에서 엉킨 심장과 피와 살점,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겪는다. 이는 시집의 서시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아이들의 함성이 들렸다 아이들은 어둠 속에 없었다 오른쪽 왼쪽 모두 비어 있었다 조명탑에 불이 들어왔다 열매와 시체와 부리 밀던 것들은 막혀 있었다 발목도 안 자르고 아이들이 함성 속을 빠져나갔다 얼룩을 따라 벽이 번지고 있었다 사타구니가 오른쪽 왼쪽으로 비틀렸다 뜨거운 눈물이 단단한 눈알에서 쏟아졌다 올해의 첫눈이 내렸다 ― 「시즌 오프」 전문 시인은 “늘 먼저 도착하는 사람”(「죽은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으로 홀로 앞서 있기에 외로운 반면 “덜그럭거리는 안은 그토록 고요”(「동그라미들」)한 이율배반의 생이 갖는 의미를 일찍 감지한다. 이를 위해 시인이 치르는 대가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는 가혹하다. “안이 들끓어 밖을 보지 못하”(「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거나 일상에 길들여져 목소리를 잃어버리거나 쉽게 관대해지지 않기 위해 시인은 늘 스스로를 경계하고 몰아세운다. 우아하게 다리를 쭉 뻗으며 더더 가늘어지란 말이다 위채로워지란 말이다 더더 내달리란 말이다 더더 더렵혀지란 말이다 확신에 닿지 않을 때까지 ― 「의자와 노랑 사이에서」 부분 “위태로움을 간직하는 법을 알게 되었어요” 앞서 세 권의 시집에서 두드러졌던 간결한 어사와 유니크한 형식 실험보다 이번 시집의 시적 언술들이 띠고 있는 밀도와 속도를 두루 갖춘 ‘진술’의 확대는 익숙한 서정 대신 세상의 배후,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예감을 견인하는 역할을 맡는다. 슬픔.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배어 있는 것입니다 베는 것입니다 순간의 가설일지라도 적어도 매달려야 할 절벽은 나타나야 합니다 절벽. 닿고 있는 것입니다. 막 닿은 것입니다 절벽. 가르는 것입니다 끊어내는 것입니다 [……] 손은 아무것도 못 잡을 때 간절합니다 꽃 속에서 나오기까지가 꽃의 골몰한 생각입니다 칼은 닿기 전까지가 칼입니다 ― 「칼은 생각한다」 부분 얼굴이 꽃봉오리로 터지며 탄다 터지는 꽃봉오리에서 살 냄새가 난다 눈이 기억을 붙잡고 탄다 글썽이며 탄다 귀가 거울을 떠다닌다 거울은 소리를 지르지만 거울 안에 소리가 생겨나지 않는다 썩을 사이도 없이 거울을 파내고 그곳에 묻힌 얼굴이 탄다 얼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얼굴의 그림자는 얼굴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뼈에 붙은 제 살을 뜯어 먹는 그림자의 입은 헤져 있다 ― 「거울에서 얼굴이 탄다」 부분 “고독이 꼭 추운 것만은 아니다” 결핍을 선택하고, 스스로를 가혹할 지경으로 몰아붙여, 오래 앓아온 시인에게 비로소, “눈부시게 추락하는 꽃들 저것이 꽃나무의 목소리다”(「사람들은 아파트의 어디에 큰 개를 기르는가」)와 같은 소멸과 생성, 끝과 시작이 한자리에서 일어나는, 단절이 아니라 접경의 사태라는 세계의 내밀한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허락된다. 흙 속에 파묻혔던 것들만이 안다. 새순이 올라오는 일. 고독을 품고 토마토가 다시 거리로 나오는 일 퍼드덕거리는 새를 펴면 종이가 된다 덜 펴진 곳은 뼈의 흔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사람. 방금 전을 지우는 사람. 두 팔이 없는 삶. 두 발이 없는 사람. 없는 두 다리로 줄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사람 첫 페이지는 비워둔다 언젠가 결핍이 필요하리라 ―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부분 “스며들어 있는 것, 숨겨진 것, 부재하는 것, 혹은 부재 그 자체 곁에 머무르는 기분”(함돈균)은 필연적으로 고독을 들여와 그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사물의 끝, 사물의 가장자리에 드리운 시선은 사물들 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이한 잉여”로서의 ‘그림자’에 남다른 주목을 요한다. 나는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뜨거운 그림자일지도 3만 광년 떨어진 거리에서 그리움으로 내내 타고 있는 당신일지도 당신 안에서 한 발도 못 빠져나온 당신의 흑점일지도 ― 「어쩌면, 지동설」 부분 그림자의 고독에까지 곧장 나아간 시인의 사유는 “사라짐 뒤에 남은 모호하고 순간적인 흔적”(함돈균)과 교감하는 데 성공한다. 바닥은 벽은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그림자들은 등이 얼마나 아플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는 그림자들의 힘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한 사내가 또는 한 아이가 나간에서 몸을 던질 때 미처 뛰어오르지 못한 그림자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몸은 허공 너머로 사라졌는데 아직 지상에 남은 그림자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 「그림자들」 전문 한편 고독의 성소에 빠지지 않고 등청하는 연인들의 비껴 선 풍경, 서로 부재하는 동안 서로에게 더욱 깊어지는 그 아름답고 애틋한 정서도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우리는 없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없는 의자와 같이 마주 앉아 있다 의자는 없고 서로 의자가 되었으므로 당신과 나 사이에는 테이블이 놓여야 하지요 테이블 아래도 밤이 자꾸 와서 당신과 나 사이가 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