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표절’은 창작을 근본으로 하는 문학과 예술계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행위이며 민감한 사안이다. 따라서 항상 소문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직접 거명하는 표절은 그것을 했다고 의심 받는 측과 그것을 폭로하는 측, 양자의 모든 명예와 문화적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공식화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표절 문제는 저작권이 중요시되는 오늘날 더욱 뜨거운 감자가 되어가고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으로 독서의 근간을 뒤흔든 피에르 바야르가 이 신작에서는 문학과 예술의 가장 민감한 이슈인 표절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대담한 가설로 기존의 관점을 역전시키고 익숙한 환경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드는 특유의 능력과 힘을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 책에서 문제 삼는 표절은 과거의 것을 후대에서 도용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통적인 표절이 아니라, 미래의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앞선 세대에서 도용하는 이른바 ‘예상 표절’이다. 이런 있을 법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저자는 수많은 표절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뿐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도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많은 앞선 작가나 비평가들이 이런 경향을 느꼈음에도 역사적 연대기 개념에 매몰되어 감히 ‘예상 표절’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대담무쌍하게 말한다. 이런 주장을 증명하고 지지하기 위해 이 책에는 소포클레스, 니체, 프로이트, 볼테르, 코난 도일, 프루스트, 모파상, 스탕달, 카프카, 빅토르 위고, 발레리, 보들레르, 제임스 조이스, 로렌스 스턴, 보르헤스 등 수많은 작가와 그들의 텍스트가 동원된다.
피에르 바야르가 내세운 표절의 네 가지 준거는 ‘닮음, 은폐, 시간적 도치, 부조화’이다. 이중 앞의 둘은 ‘전통적 표절’과 ‘예상 표절’에 공통된 것이고, 나머지 둘은 두 표절을 구분한다. 그리고 미래를 훔칠, 또는 엿볼 수 있는 근거로 시간의 흐름을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 고정시킨 ‘선형적 세계관’ 대신 ‘순환적 세계관’을 제시하며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데 유용한 서양 문명의 선형적 세계관은 정신적 활동의 연대를 자리매김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전대와 후대 사람의 뿌리 깊은 대립 위에 근거하는 기존의 표절과는 다른 쌍방 표절, 집단 표절, 우연한 일치 등 여러 경우를 예시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선형적 연대기와 별개로 다층적인 시대의 교감에 따라 이루어지는 창작물을 위한 새로운 기준의 정신적 연대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상 표절’은 파렴치한 행위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감응과 영감의 원천으로 규정된다.
나아가 저자는 예술의 연대기에서 작가의 이름을 지우자는 발레리를 거론하며 개인적이 아닌 시대적, 집단적 정신활동의 결과물인 창작은 “우리가 아이디어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세입자”라는 대담한 언급으로 나아간다. 이 부분은 시장경제에 기반을 두고 더욱 중요성과 논란을 키우고 있는 저작권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이 와중에 니체에서 프로이트로, 그리고 자살한 정신분석학자이자 프로이트의 제자인 타우스크에 이르는 일련의 ‘예상 표절’에서 어떻게 타우스크가 스승인 프로이트의 머릿속에서 아직 성글지 않은 아이디어를 빼내는지, 마치 뇌수술 과정을 느린 화면으로 재현하듯 보여주는 장면은 문학비평가이자 정신분석가인 저자의 힘이 최고로 발휘되는, 이 책의 백미이다.
표절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는 이 책의 의도가 단지 폭로에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표절을 화두 삼아 전통적 연대기에 갇히고 고립되어 설명될 수 없는 정신적 활동과 작품들 사이에 다양한 소통의 길을 열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층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웹 세상을 열어젖혔듯이 낯설지만 완전히 새로운 열린 공간을 향해 정신과 감성을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