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회고록 상 - 양장

노태우
5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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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상권 노태우 회고록 上 -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머리글 제1장 나의 어린 시절 제2장 陸士 생도 시절 제3장 국군 將校의 길 제4장 5ㆍ16혁명과 방첩대 생활 제5장 베트남 戰線 제6장 維新과 尹必鏞 제7장 空輸여단장 시절 제8장 경호실과 車智澈 제9장 9사단장 제10장 10ㆍ26사건에서 12ㆍ12까지 제11장 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시절 제12장 서울올림픽 유치 지휘 제13장 2ㆍ12총선과 민정당 대표 제14장 6ㆍ29선언-모든 것을 건 승부 제15장 13代 대통령선거 제16장 취임 前後 제17장 서울올림픽-祖國이 가장 빛났던 순간 제18장 '5共 청산'?風 제19장 중간평가 유보 제20장 3당 合黨과 갈등 제21장 민자당 競選과 金泳三 제22장 중립내각으로 大選 하권 전환기의 大戰略 제23장 민주화와 자율화의 전면적 확산 제24장 전환기의 經濟, 도전과 응전 제25장 구조개혁과 200만 호 건설 제26장 KTX, 영종도 공항, 서해안 고속도로 제27장 法질서 확립 제28장 轉?期의 교육정책 제29장 21세기를 향한 비전과 투자 제30장 언론장의 보장 제31장 문화ㆍ예술ㆍ스포츠의 생활화 제32장 靑瓦臺 생활 제33장 통일을 위한 遠交近攻 제34장 한국-헝가리 修交 제35장 東歐 민주화 혁명의 현장에서 제36장 韓蘇 수교 제37장 北京으로 가는 길 제38장 韓中 수교의 幕前幕後 제39장 남북대화시대의 開幕 제40장 남북기본합의서 제41장 심각해지는 北核문제 제42장 南北 막후秘話 제43장 하반도 非核化 선언 제44장 분단 46년 만에 유엔 가입 제45장 韓美 관계의 順航 제46장 북방외교의 철학 제47장 退任과 歸鄕 제48장 國政 리더십에 대하여 제49장 정치자금 제50장 따뜻한 눈으로 歷史를 보자 盧泰愚대통령 연보 賞勣 기록 분야별 주요 업무 日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노태우 회고록 보도자료 (상) 제6장 유신과 윤필용 사건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실언한 것을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잘못 전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공수특전1여단장도 같은 생각을 했다. ▶강창성 개인적 복수심에서 하나회를 과장 발표, 여론 오도했다. 나중에 박 대통령도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유능한 장교들 희생시키는 것 알고 조사 중단시키고 보안사령관 직에서 해임시켰다. 제7장 공수여단장 시절 ▶공중낙하 합동결혼식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멋진 행사가 있었다. 1975년 4월19일에 치러진 28쌍의 공중낙하 합동결혼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사관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부모와 친인척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소지가 없지 않았다. 나는 ‘이들에게 떳떳한 가정을 만들어 주자. 그러기 위해서는 만인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올려 주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대대장들에게 “해당 인원을 파악하고 여단장이 직접 주례를 서는 훌륭한 결혼식을 올릴 터이니 이 같은 취지를 당사자와 부모들에게도 설명하고 동의(同意)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파악해 본 결과 새로운 신랑·신부를 합해 모두 28쌍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결혼식을 생각해 냈다. 결혼식장을 행주나루 백사장에 마련하고 주례인 나를 비롯한 신랑 28명 전원이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백사장에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신부에게로 날아가는 시나리오였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우리들을 축복해 주리라 믿었다. 이색(異色) 결혼식이라는 소문이 퍼져 TV를 비롯한 언론사 기자들이 몰려오고 이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아침엔 날씨가 잔뜩 찌푸려 걱정을 했는데 오전 10시가 지나면서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개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우리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결혼식장을 멀리 한 바퀴 돈 후 나를 선두로 해서 결혼식장을 향해 뛰어내렸다. 알록달록한 낙하산 29개가 나비처럼 꽃다발을 안고 있는 신부 쪽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제8장 경호실과 차지철 ▶대통령 측근들 각 부처 장관이나 지방행정 책임자들이 보고하고 박 대통령이 지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조직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는 데다 18년간 국가를 통치해 온 관록이 있어서인지 보고자들보다 내용을 더 깊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실(不實)한 보고는 용납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의도를 제대로 받들고 인정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우수한 사람이 노력을 많이 해야 했다. 공무원 사회는 자연스레 엘리트 관료화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주도권을 잡았던 혁명주체들은 이제 2선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젊은 엘리트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다만 정치 분야에서는 전혀 그렇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박 대통령을 만 1년간 모시면서 보니까, 국사(國事)를 야당 책임자와 만나 진지하게 논의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을 받드는 사람들도 박 대통령이 야당 당수와 만난다는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단정하고 있었다. 야당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 역시 야당이 박 대통령의 업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이 나라 발전에 온몸을 바쳐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존경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당시 박 대통령의 신념은 ‘먹지 못하는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를 한단 말인가? 우선 배불리 먹고 세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율을 모르는 민주주의란, 말만 민주주의이지 혼란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김일성이 원하는 대로 나라가 흘러가게 된다. 나라를 그 꼴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어느 수준까지는 다소 인권(人權)을 희생시키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권력 측근에 있는 인물들의 자세와 행동이었다. 박 대통령의 신념(信念)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그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과 야당 속에 몸을 던져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거의 없어 보였다. 많은 측근인사들이 박 대통령 앞에서는 “각하가 아니면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각하야말로 민족의 태양이십니다. 백성은 우매하고 야당은 한결같이 비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야당이나 국민과의 거리를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박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육군 소장의 계급, 또 경호실 작전차장보라는 직책으로 이런 생각들을 솔직히 말씀드릴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박 대통령이 추구한 정책 가운데 이 새마을운동만은 당리당략(黨利黨略)이라는 차원을 떠난 온 국민의 합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정치적인 이해득실(利害得失)로 따지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순수성을 의심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집념은 순수한 애국심 그 자체였다. 제9장 9사단장 ▶自由路 발상 원래 이 도로의 아이디어는 1979년에 내가 건의한 것이다. 군단장과 군사령관에게 보고해 동의(同意)까지 얻었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는데 길을 지금 만들어진 것보다 강 쪽으로 400~500m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면 많은 한강 둔치를 조성할 수 있어 그것을 팔아 공사비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군에서는 나의 건의를 관계 부처에 넘겼다고 했는데 정부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 확인해 보니 이 건의서가 건설부에서 잠자고 있었다. 즉시 건설부 장관에게 검토를 시켜 타당성을 보고 받았다. 그래서 내 대통령 임기 중에 거의 완성된 것이다. 사단장 때의 아이디어가 대통령이 되어 실현된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自由路)를 칭찬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제10장 10·26사건에서 12·12까지 ▶부대 출동 명령 간단하게 정리하면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상 어느 쿠데타도 병력을 동원하는 부대장이 부대를 이탈해 지휘할 수 없는 곳에 가 있은 예는 없었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제11장 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시절 ▶세 金씨 나는 계엄분소장으로 있으면서 유관기관장뿐만 아니라 언론계 간부와 교수·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김종필(金鍾泌) 씨= 정치적인 감각과 국가경영의 관록 등은 누구보다 잘 갖추고 있다는 평이었다. 그는 두 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제3공화국의 주요 국정(國政)책임자로서 유신(維新)과 장기집권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유신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유신을 반대했다고 변명하고 나선 자세였다. 그가 단호하게 ‘제3공화국과 관련해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잘잘못은 국민들의 심판에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였다면 역사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군인의 입장에서 몹시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다. ◇김영삼(金泳三) 씨= 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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