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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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술의 본질, 문학적 체험에 대한 블랑쇼의 가장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탐구 ‘바깥의 사유’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오늘날 현대철학에 새로운 지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 왔으며, 많은 작가와 독자, 비평가들에게 끊임없이 문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선사하는 모리스 블랑쇼. 20세기 이후 서구 문학에 대해 가장 탁월한 분석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역작 『도래할 책』이 그린비 블랑쇼선집 다섯번째로 출간되었다(선집 권차로는 3권). 블랑쇼는 이미 1955년에 『문학의 공간』(그린비 블랑쇼선집 2권)에서 우리에게 문학이 무엇인지, 문학이 과연 가능한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그로부터 4년 후 출간된 『도래할 책』은 『문학의 공간』에서 소묘되었던 글쓰기, 작가, 작품, 독서 등과 같은 그의 개념들을 더욱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으로 다룬다. 또한 『도래할 책』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부터 독일 작가 헤르만 브로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아우르며, 그들 작품과 자신의 문학에 대한 사유를 자연스럽게 조화시키고 있다. 『도래할 책』은 이질적이지만 매혹될 수밖에 없는 세이렌과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문학이야말로 이질적인 것의 수용이며, 고정적이고 정적인 것에 대한 위반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에 대한 관심과 바타유의 ‘위반의 사유’ 등을 수용한 것이다. 블랑쇼의 전기와 후기 사유 사이에 있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선집의 흐름 속에서 블랑쇼가 점점 더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고, 독단적이고 동일한 사유의 억압을 해체하는 위반적인 글쓰기로 이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문학의 본질뿐만 아니라 문학의 가능성을 물으며, 그 본질과 가능성이 ‘차이’ 개념에서 시작함을 독자들에게 보여 준다. 블랑쇼에게 있어 모두에게 똑같은 의미를 갖고 출간되는 책, 같은 읽기와 쓰기를 만들어 내는 독자와 저자는 없다. 오히려 독자와 저자들은 거기서 언어의 저장고에 불과한 책들을 불태우고, 다시 읽고 다시 쓰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블랑쇼는 이런 차이의 생성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이며, 이렇게 차이를 만들어 낼 때만 문학의 본질이 곧 문학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적 체험에서 만나는 차이들은 독자와 저자들을 언제나 ‘다시-새로운’ 사유의 공간, 다른 것들로 환원 불가능한 생성의 시공간으로 이끈다. 한국에서 소개된 수많은 문학이론에 관한 담론들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문학비평이론(정신분석이론, 페미니즘이론 등)으로 문학의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아니면 텍스트 비평에만 그 범위를 국한시켜 왔다. 블랑쇼의 이번 『도래할 책』은 다양한 문학가들의 작품을 경유하고, 그만의 독특한 개념들을 통해 문학의 본질을 우리에게 되물으며, 문학이 도래할 시간으로, 모든 차이가 생성되는 매혹과 이끌림의 장소로 우리를 끌어가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문학, 자기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곳 블랑쇼는 『도래할 책』 1부에서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디세우스는 낮의 질서와 빛만을 받아들이면서 동일성과 지배의 세계에 위협적인 것들을 배제하려는 인물이다. 그와 반대로 세이렌은 타자를 의미하며, 영웅의 귀환을 방해하고 낯선 곳으로 자꾸만 떠돌게 하는 매혹의 목소리로서,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는 신화에서처럼 귀환의 욕망, 자기를 유지하려는 욕망에 갇혀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도 못하고, 세이렌을 만나지도 못한다. 오디세우스는 그저 귀를 막는 회피와 우회 속에서만 세이렌을 만나지만,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야만 한다. 문학적 체험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블랑쇼에게 있어 문학은 기존의 주체가 갖고 있던 단단한 지반이 무너져 내리고, 존재하던 장소에서 추방되는 경험이다. 이는 기존 문학비평이론과의 전적인 단절을 의미한다. 여전히 현대의 문학이론가들은 이데올로기적 비평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블랑쇼가 살아 있던 당시 유행했던 신비평(nouvelle critique) 담론을 이끌던 많은 학자들 역시도 문학을 텍스트 해석의 대상으로만 접근했을 뿐, 그 안에서 타자성을 발견했다기보다 여전히 작품이 지닌 내적 맥락에 충실한 해석을 드러내는 데 급급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블랑쇼는 현대 문학이론가들의 이러한 사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문학이론들은 문학을 어떤 사회적 관계의 실체로 파악하고, 그 단면만을 살필 뿐이다. 블랑쇼에게 문학은 어떤 내재적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거나 고유한 실체라기보다, 독자들이 작품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과정이자 그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다. 어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다시-새롭게 쓰는 일일 뿐이다. 글을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 모두 수많은 타자와의 만남이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글쓰기와 읽기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블랑쇼 문학이론이 예술지상주의가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강조하는 바깥의 사유임은 여기서 알 수 있다. 문학의 본질이 ‘사라짐’이라고 말하는 블랑쇼의 단언은 바로 차이를 생성한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곳이 아닌 바깥(dehors)과의 연관 속에서 문학은 언제나 가능하고 그 본질을 드러내며, 타자를 만나는 순간 나의 자리는 불태워지고, 그곳에서 작품은 읽히고 쓰인다. 자아가 사라지는 곳, 읽기와 쓰기가 무한히 움직이는 과정, 그것이 바로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의 본질이다. 도래(a venir), 새로운 사유의 시간 블랑쇼는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생산해 냄으로써 세계를 재정의하려 하는 문학적 경험에 또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 결과 작가와 독자는 선형적인 미래가 아닌 도래할 시간, 도래할 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가와 독자는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문학을 부재의 지점, 요컨대 자신의 기원이 됨과 동시에 부단히 자신이 다시 시작되는 종말의 지점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블랑쇼에게 심연의 소리를 듣고 사라지는 저자는 이미 다가올 독자이며, 작품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말하려는 독자는 도래한 저자이다. 이러한 반복은 모든 것이 다시 오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는 영원회귀 사상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작가와 독자들은 모든 안정화를 벗어나려는 “도래할 책”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가능한 것들을 재창조하고, 생성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려고 한다. 이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러하기에 블랑쇼의 문학이론은 단일성의 사유가 아니라 복수성의 사유다. 또한 그는 사유의 복수성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말라르메 시에서의 ‘우연’과 ‘차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구원과 진보를 향한 선형적 사유가 아니라 ‘입체적인 사유’로 바꾸어 놓았다. 이 러한 영원회귀는 끝없는 생성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생성은 문학적 체험이 말해 주듯 ‘자신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도래할 시간에서 생성되는 차이로 인해 블랑쇼의 문학이론은 허무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많은 학자들이 죽음과 황야, 저자의 죽음, 텅 빈 공간 등을 말하는 블랑쇼의 사유를 또 다른 형태의 허무주의라고 지칭하곤 하나, 오히려 블랑쇼가 보기에는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만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무한히 차이를 생성해 낼 수 있다. 도래할 책은 고정된 자아가 존재하던 장소를 태워 버리며, 그 잿더미 속에서 변화를 생성해 내는 책이다. 이 생성은 독자, 작품, 작가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 가능성이 열리는 시간 속에서 변화는 생성되고, 문학은 독자와 저자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문학적 체험을 하게 되며, 거기서 탄생하는 변화는 어느 것으로도 환원 불가능한 새로운 사유가 된다. 『도래할 책』은 그 어떤 책들보다 강하게 우리가 문학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물음표를 던지고, 우리 삶과 문학에 대해 성찰하도록 돕는다. 물론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은 유용성이나 이해관계, 어떤 실천적 행위 개념과 무관하다